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달아날 수 없는 곳, 공터에서

입력
2017.08.14 14:24
0 0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등장인물은 그가 살던 소설 속을 떠나 내게로 거처를 옮기고 나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수천 수만의 인물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내 안에 이리도 많은 공터가 있었나 놀란다. 좋은 소설일수록 거기 인물에게 더 큰 공간을 내주게 된다. 근래 읽은 김훈 소설 ‘공터에서’의 주인공 마동수와 그 식구들이 그렇다.

‘공터에서’는 삶의 중심부에 이르지 못하고 평생 공터를 떠돌았던 아버지 마동수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마동수는 젊은 날 잃어버린 조국을 품에 안고 만주 땅을 떠돌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가까이에 있기도 했으나, 큰 흐름에 끼어들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땅 위의 어떤 곳도 그에게 고향이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민의 행렬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온 그는 전쟁의 혈흔으로 얼룩진 군복을 세탁하는 일을 하게 된다. 공터에서 세탁물을 말리던 그는 비슷한 처지의 여자 이도순을 만나 살림을 차리고 장세와 차세 두 아들을 낳는다.

두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공터를 떠나고 지우려 했으나 결국 아버지의 터전을 빼 닮은 장소로 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 버리고 지우며 걸어온 그 길은 핏줄이라는 단단한 도로가 놓여 있었다. 장세는 아버지의 흔적이 싫어 타국에서 사업을 하다 험한 일에 엮이게 되고, 차세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며 다시는 이런 불쌍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아버지의 환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버지가 세상에 활착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찾아 헤매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초라한 것들을 세상에서 이루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을까,’ 아버지를 연민하는 차세 자신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끝도 답도 보이지 않는 일상을 이어간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면서도 혈연의 선로를 따라 달리는 기차의 운명을 타고 났다. 우리는 늘 선로 이탈의 꿈을 꾸지만 그 꿈은 선로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게 인간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운명이다.

공터에서 우리는 삶의 허무를 달래려 작은 사랑에도 기대고, 텅 빈 장소에서 발견하는 텅빈 인생을 채우려 새 생명을 갈구하게 된다. 마동수와 이도순이 공터에서 빨래를 하다 만나듯이, 마주보는 누군가가 나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공터를 의미로 채워진 곳으로 변모시킬 수 있으며 서로 맞잡은 빨래의 끝을 끝까지 비틀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공터에 홀로 남아 이승의 마지막 썰물을 타고 외로이 저 세상으로 건너간다. 그러면 그곳은 다시 쓸쓸한 공터로 남고 마는가. 아니다. 우리가 남긴 생명이 다시 그 공터를 비슷한 삶의 내용으로 채우며 그 공간의 허무를 몰아낸다. 공터는 텅 빈 허무이면서 동시에 충만한 의미의 두 얼굴로 그 존재를 이어간다. 한 인생이 그 공터를 떠나더라도 그가 남긴, 그를 닮은 생명이 그의 삶을 반복해줌으로써 인생은 영원성을 확보하게 된다. 결국 그 영원성이 공터의 허무를 이기게 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초라한 공터를 떠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의 벌판을 건너가야 할’ 운명이다. 저마다 가슴에 드넓은 광야를 품고 있지만 재갈을 벗어 던지고 저 멀리 달려나가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터에서 자라나는 풀 포기에도 이름을 짓고 불러 주어야 하며 거기 돌무더기 위에 우리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곳을 삶의 중심부로 만들고자 몸부림치는 뭇 인생들을 젖은 눈과 환한 미소로 바라보아야 한다. 소설을 읽는 것은 등장인물의 뒷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이고, 그의 걸음에 발 맞춰 함께 걸어가는 일이고, 그의 인생을 강물처럼 안아주는 일이다. 그러면 그 많은 인물들이 내 안에 들어와 내 편이 되어 살아가기 시작하니, 인생 무엇이 두렵겠는가.

제갈인철 북뮤지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