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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중생의 아픔은 곧 내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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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중생의 아픔은 곧 내 아픔

입력
2018.06.06 10:2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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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불 들어갑니다!” 수많은 추모객들이 연화대를 중심으로 둘러섰는데, 멀찌감치 서 있는 내 귀에 또렷이 들려오는 외침소리. 잠시 후 연화대에 불이 붙자 하늘로 자욱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숲에서 우짖던 맑은 종달새 소리도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지난주 고성 건봉사에서 거행된 시조시인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다비식.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어차피 한 마리/기는 벌레가 아니더냐//이 다음 숲에서 사는/새의 먹이로 가야겠다”(조오현 ‘적멸을 위하여’) 이 시에서처럼 스님은 한 줌 연기로 화해 ‘적멸(寂滅)’의 길로 떠나셨다.

벌써 십 수 년 전 오현 스님과의 인연으로 또 다른 다비식을 본 적이 있다. 단풍이 불타던 부산 통도사에서 거행된 중광 스님의 다비식. ‘괜히 왔다 간다’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떠난 중광 스님. 그 때 다비식을 보고 오며 정말 우리 인생은 괜히 왔다 가는 것일까 잠시 고뇌에 빠졌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우리는 정말 괜히 왔다 가는 것일까. 스님 한 분은 세계인들이 기억할 만한 독창적인 서화를 남기셨고, 또 한 분은 격조 높은 시를 남기셨다. 내 서재 벽에는 중광 스님이 손수 그려주신 눈 부릅뜬 달마도 한 점이 걸려 있고, 내 서가엔 오현 스님의 시집들이 꽂혀 있다.

그날 오현 스님 다비장 현수막엔 이전에 본 적이 없던 짧은 시가 눈에 띄었다. 궁금해 스님의 제자에게 물어보니 스님의 ‘열반송’이라고 했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역시 오현 스님다운 열반송이 아닌가. 평소 성속의 경계를 뛰어넘어 중생의 아픔을 보듬고 살았던 스님의 겸허를 엿볼 수 있는 노래가 아닌가. 일찍이 오현 스님은 여러 법문에서 ‘중생의 아픔이 내 아픔이 돼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아니 당신 자신이 그렇게 사셨다.

스님은 한국의 작가들을 위한 만해 마을을 만드시고 해마다 열리는 만해 축전 때마다 두툼한 잡지를 내곤 했다. 그런 어느 해 잡지를 읽다가 놀란 건 잡지 후기에는 축전 기간에 음식공양을 준비해 주는 용대리 마을 아줌마들의 이름까지 다 수록돼 있었다. 그 때 나는 스님의 말씀이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중생의 아픔이 내 아픔이 돼야 한다’는 말씀이 그냥 수행자가 폼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평소 ‘내게 돌을 던진 사람도, 내게 꽃을 던지는 사람도 사랑하라’던 스님의 영정사진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문득 스님이 살아계실 때 백담사에서 만든 달력에 수록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 한 수가 떠올랐다. 여러 해 전 달력이지만 그 시가 실려 있어 아직도 떼지 않고 서재 벽에 걸어두었다.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 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 년을 산다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아득한 성자’) 수행자의 한평생도 하루살이의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이리라.

다비장의 불길이 잦아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 무려 스무 날 동안이나 곡기를 끓으셨다니 뼈만 앙상하셨으리라. 이제 검은 재만 남았을 뿐이지만 조문객들은 스님과 작별하는 게 아쉬운지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붐비는 사람들을 벗어나 스님이 거처하셨던 신흥사에서 가까운 바닷가로 이동했다. 안개비 내리는 바다는 잿빛이었다.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는 이제 몸을 벗어버린 스님의 웅숭깊은 운율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밤늦도록 불경을 보다가/밤하늘을 바라보다가//먼 바다 울음소리를/홀로 듣노라면//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바람에 이는 파도란다.”(‘파도’)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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