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등록 : 2018.02.05 04:40
수정 : 2018.02.06 07:57

[오은영의 화해] 착한 선생님? 기가 약해 학생들에 휘둘리기만 하는데...

남편에게 방치되는 느낌 들면 화 못 참아

등록 : 2018.02.05 04:40
수정 : 2018.02.06 07:57

#인생 피곤해 안정적 직장 택했는데

애들과 갈등 생기면 도망가고만 싶어

남편이 조금이라도 무관심 할때는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분노 일어

사소한 일에도 극단적 생각 일쑤

전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교원평가에서 늘 “친절하고 상냥한 선생님”이란 말을 듣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엔 아이들을 두려워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어요.

겉으로 보기엔 좋은 남편과 탄탄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지만 마음 속의 공허감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유년기의 기억은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에 벌벌 떤 것 밖에 없어요. 아빠는 엄마의 행동이 거슬리면 불같이 화를 내고 엄마를 정서적으로 완전히 파괴하고 나서야 화가 가라앉곤 했어요. 그러고 나면 또 며칠간은 경박스럽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싸움 직후 도망치듯 제 방으로 들어와 흐느끼는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저는 아빠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과 증오를 느꼈어요.

아빠는 별 것 아닌 일에도 자식들을 깎아 내리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것밖에 안되냐, 이기적이다라며 비아냥댔어요. 그러고 나선 자신의 양육이 부족한 것 같다며 사과하는 등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어요. 엄마가 아빠 때문에 우울해하실 땐 곁에서 진심으로 같이 슬퍼했지만 아이로서 사랑 받고 주목 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엄마의 감정을 보살피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었거든요.

그때 제 욕구가 방치되는 것에 대해 깊은 분노가 내재된 것 같아요. 지금도 남편이 저를 방치한다고 느낄 때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화가 나서 종종 갈등이 생기곤 해요. 깨웠는데 계속 잔다든지, 음식 중에 남편이 싫어하는 재료가 있는데 그걸 얘기한다든지, 아주 사소한 일에도 크게 낙심하고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극단적인 마음이 올라옵니다. 남편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정말 좋은 사람인데 제가 기준이 너무 높고 예민하단 생각이 들어요. 남편과 멀어질까 봐 두려워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다 보면 어김없이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요. 어딜 가나 긴장되고 메마른 분위기… 전 정서탱크가 텅 비어있었고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친구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제 안에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어요.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인생이 너무 피곤해서였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이니 크게 신경 쓸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허나 현장에 나와 보니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제가 발령받던 해에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됐고 교실에선 막무가내로 구는 아이들을 제재할 수단이 전혀 없이 그저 담임교사의 역량으로 버티는 상황이었어요. 반 친구들을 때리고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가 있어 제지를 했는데 저의 지도에 전혀 따르지 않아 학부모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학부모는 오히려 제가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공격하며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어요. 이로 인해 저는 관리자에게 불려가 “잘 좀 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차적으론 교육제도의 문제라고 보지만 한편으론 제 탓이란 생각도 들어요. 전 아이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합니다. 정서적으로 거리가 있다 보니 아이들도 저를 따르지 않는 듯 해요. “착한 선생님”이란 말을 듣지만 사실은 자기 보호나 경계 설정을 잘 못합니다. 한 마디로 기가 약해요. 공격적인 아이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물러서버립니다. 경계 설정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그때그때 아이들에게 옳은 행동과 옳지 못한 행동을 구분하며 바로잡아 줄 수 있을 텐데, 저는 이게 잘 안돼요. 이제 5년 차에 접어들어 처음보다는 많이 단호해졌지만 여전히 제가 맡은 학급은 질서가 잘 흐트러집니다. 아이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나누기 보다는 아이들의 미성숙함에 늘 휘둘리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왜 교사를 택했을까 하는 후회가 매일 들어요.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교사라는 직업을 제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이 거의 없어서 저는 아이를 낳는 것도 망설이고 있어요. 그러나 막상 진로를 바꿀 엄두는 못 내는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집니다. 이미 들어선 이 길에서 승부를 보자고 다짐했다가도 이내 다시 후회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요.

윤선미(가명ㆍ33세,ㆍ초등학교 교사)

#폭발적으로 화내고 비는 아버지 탓

응석 부릴 나이에 엄마 위로 도맡아

아이답게 살아보지 못해 돌봄 갈망

남편에게 솔직한 감정 털어놓고

이해받으며 조금씩 치유해가요

선미씨, 일단 저는 당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미씨는 스스로가 더 좋아져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남편에게 화를 낼지언정 남편이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건 결국 자신의 문제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어요. 이건 선미씨가 갖고 있는 굉장히 좋은 면이에요.

그럼에도 선미씨의 마음은 늘 마치 선인장의 가시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편해요. 왜 그럴까요. 먼저 초등학교 교사로서, 선미씨는 아이들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어요. 물론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어렵고 두려운 존재예요. 그런데 선미씨는 유난히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 갈등을 겪고 심지어 적반하장과 같은 일도 경험했어요. 제가 보기에 선미씨는 아이들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착하고 상냥한 선생님이란 말은 사실일 거예요. 실제로 착한 선생님이지만 선미씨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걸 무서워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거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건 자신의 두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미씨가 스스로 만든 거리예요.

남편과의 관계를 한 번 보죠. 남편은 선미씨의 표현을 빌면 매우 성숙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성숙한 사람도 일상의 사소한 갈등들을 겪어요. 깨웠는데 안 일어난다든지, 정성스럽게 음식을 했는데 충분히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죠. 그런데 선미씨는 여기에 ‘방치’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선미씨는 왜 이런 말을 썼을까요. 방치는 흔히 열이 펄펄 끓는 사람 앞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배우자의 태도를 이를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선미씨는 남편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방치된 듯한 심정을 느껴요. 이걸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미씨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상대방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방치 당했다고 느끼는 듯 해요. 예를 들어 선미씨가 뭔가를 싫어하는 감정을 토로했을 때 동의가 아닌 “그게 왜 싫어?”라는 대답을 들으면 정서적으로 방치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냥 서운한 감정 정도가 아니라 거의 버려지는 느낌을 받는 거죠. 방치라는 건 누구에게도 돌봄 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해요. 심한 경우 유기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런데 사소한 일상에서도 방치 당했다는 고통을 느낀다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매우 두려울 거예요. 일단 가까운 사이로 설정이 되고 나면 거의 혼연일체가 되지 않는 한 방치의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거든요. 아이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과 가까워지면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있는 거예요. 선미씨가 이렇게 극단적인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어린 시절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선미씨가 아버지에 대해 갖는 증오의 근원은 뭘까요. 아버지는 예측불허의 인간이었어요. 차라리 늘 무서운 얼굴이었다면 선미씨가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찾아냈을 거예요. 하지만 폭발적으로 화를 내다가 별안간 비굴할 정도로 사과를 하는 사람에게선 대처법을 찾기가 어려워요. 문제는 이런 아버지는 자식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동시에 경멸감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자식의 입장에서 이 아버지는 화를 낼 땐 공포를, 비난할 땐 억울함을, 사과할 땐 경멸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예요. 자신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자신을 두렵게 할 때 사람의 자존감은 땅바닥으로 떨어져요. 이렇게 하찮은 인간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나는 또 얼마나 하찮은가, 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게다가 선미씨는 두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남은 여력으로 엄마까지 위로해야 했어요. 아이로 살았던 시기가 과연 있었나 싶어요. 선미씨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희로애락에 대해 한 번이라도 충분히 이해 받아본 적이 있나 싶어요. 이런 이해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이해를 못 받아도 거의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치닫는 거예요.

제가 선미씨에게 드리고 싶은 조언은 남편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시라는 거예요. 다행히 선미씨는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줄 준비가 된 사람을 만났어요. 남편을 믿고 선미씨가 느끼는 실망감, 공허감, 버려진 듯한 감정에 대해 말해보세요. ‘여보, 당신이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방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당신이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져’라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럼 남편이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당신을 왜 버려. 다른 의도 없이 한 말이야’라고 대답해줄 거예요. 선미씨에겐 이런 말을 듣는 경험이 필요해요. 남편이 아버지처럼 선미씨를 짓밟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믿으세요. 남편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에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호 작용을 만들어 가세요.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요.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선 어느 정도 학습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건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더구나 선미씨는 어린 시절에 정서적 수용과 수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낄 수 있어요. 초등학생 아이들의 발달을 이해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떻게 말할 때 더 효과적인지, 기술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선미씨는 본래 이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배울 수 있어요. 암울한 어린 시절을 딛고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는 어른이 된 선미씨에게 꼭 얘기해주고 싶어요. 당신 앞에 놓인 길은 수월치 않으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에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은 가능할 거예요.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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