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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허버트 C. 후버(10월 20일)

입력
2017.10.2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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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주의자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다섯 차례나 추천 받은 미국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박애주의자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다섯 차례나 추천 받은 미국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허버트 C. 후버(Herbert Clark Hoover)는 1929년 3월 취임한 미국 31대 대통령이다. 입지전적 사업가이자 국제적 박애주의자로, 또 유능한 행정가로 이름 높던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였지만 민주당 내에도 꽤 광범위한 지지층이 있었을 만큼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약 반 년 뒤 닥친 대공황(10월 24일 주식시장 붕괴)과 잇따른 실정으로 참담한 평판 속에 민주당에 정권을 내줬다. 그와 후임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의 악연도 유명하다.

그는 1874년 서부 아이오와 대평원의 주민 수 265명의 작은 마을 웨스트브랜치의 방 두 칸 짜리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6살에 아버지를 잃고 9살에 어머니마저 숨지면서 그는 형, 여동생과 그는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리건 주 외삼촌 집에서 성장한 그는 스탠퍼드대 개교 원년(1891년) 입학생으로 지질학(광산학)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한 광산개발업체에 취직해 전 세계 광산 채굴현장을 누비며 수완을 발휘, 27세에 회사 4명의 파트너 중 한 명으로 승진했다. 회사를 그만둔 34세 당시 그는 세계 여러 광산에 지분을 보유한 억만 장자였다.

1차대전 발발 당시 영국에 머물던 그는 자비(自費)를 들여 발 묶인 미국인 여행자 12만 명의 귀국을 주선했고, 연합국 전쟁 기아구제위원회 책임자로서 구호활동을 지휘했다. 1921~23년 대기근의 소비에트에서도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빨갱이를 돕는다는 일부의 비난에 그는 “이념과 상관없이 굶주림은 없어야 한다”고 당당히 밝혔다. 2차 대전 직후엔 민주당 출신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기근 근절 국제협력 대사로 그를 발탁하기도 했다. 그는 무려 다섯 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공황기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국민의 기대에 못 미쳤다. 관세를 올려 사태를 악화했고, 박애주의자 명성에 걸맞지 않게 실업자ㆍ빈민 구제에도 무능했다. 그는 해군차관 시절 그의 팬이었다고 공언하기도 했던 루스벨트(민주당)에게 32년 대선서 패배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후버댐은 그가 상무장관 시절 입안해 대통령이던 31년 착공했다. 루스벨트 뉴딜정책의 상징이 실은 그의 업적이었던 셈이다. 36년 완공식에 루스벨트는 후버를 초대조차 하지 않았고, 다들 ‘후버댐’이라 부르던 이름도 ‘볼더댐’으로 공식 명명했다. 그 이름을 되돌린 것은 47년 해리 트루먼에 의해서였다. 그가 64년 오늘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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