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
여행작가

등록 : 2017.03.03 15:18
수정 : 2017.03.03 15:18

[채지형의 화양연화] 함께여도 좋은 길

등록 : 2017.03.03 15:18
수정 : 2017.03.03 15:18

“도망쳐” 결혼소식을 들은 친구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제목도 아니고. 의외였다.

늦은 나이에 하는 결혼이라 “헉”과 “억” 정도는 예상했지만, “왜?”라고 되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혼자 사는 데 최적화 되어 있는데 결혼은 왜 하려고 하느냐, 결혼하면 지금처럼 여행을 갈 수나 있겠느냐, 자유롭게 살다가 왜 스스로 코를 꿰려 하느냐 등등.

이렇게나 ‘나는 반댈세’가 많을 줄이야.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새 출발을 축하해 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까운 이들의 목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올해 우리나이로 47세. 나이만 보면, 딸내미 시집 보낼 때가 다 되었는데 결혼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나 쑥스러운지. “너는 결혼 안 할 줄 알았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바람처럼 살 줄 알았지”라는 선배의 말씀. 선배에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혼자 신나게 놀았으니 앞으로는 둘이 사는 재미를 누려보고 싶다고. 두 손 꼭 붙잡고 사이 좋게 늙어가고 싶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혼자 사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먼저 나온다. 작업실은 이삿짐을 막 옮겨놓은 듯한 상태인 데다, 마감에 쫓겨 옆에 있는 사람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나쁜 버릇, 1인분에 프로그래밍 된 온갖 습관들, 스스로도 용서하기 힘든 산만한 행동과 다짐들. 이런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까. 속아서 결혼했다며, 민폐녀로 등극하는 것은 아닐까. 후배 선재는 ‘결혼은 어드벤처’라고 정의했는데, 이미 머릿속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규슈올레 17번째 루트인 미나미 시마바라코스. 숲과 바다, 한적한 전원풍경까지 마음을 모둠어주는 풍경이 다 모여있다.

렛츠 오르레를 신나게 외치는 일본 올레꾼들.

머리도 마음도 비우기 위해, 올레 길을 걸었다. 일본 남부 규슈 지역에 있는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였다. 규슈올레는 1년에 두 번, 각 코스마다 올레 길을 함께 걷는 행사를 하는데 그날은 봄을 여는 첫 번째 이벤트였다. 핑크색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시작점인 구치노츠 공원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렛츠 오르레(Let’s Olle)”를 힘차게 외치고 출발. 아이 손을 잡은 아빠, 간난아이를 엎은 엄마, 분홍티셔츠를 맞춰 입은 동호인들, 개구쟁이 형제들까지 함께 걷는 이들의 밝은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졌다. 일본의 시골 풍경도 우리네 시골과 비슷했다.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과 그들의 열매인 양파가 가득 쌓여있고, 그들 뒤로는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 옆으로 사이 좋은 노부부가 손을 잡고 지나가는데, 히말라야 파라다이스 롯지에서 만났던 독일인 부부가 떠올랐다.

올레길을 걷다 지그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일년 중 한 달은 히말라야를 여행하는 독일인 부부. 포터도 가이드도 없이, 서로 의지하며 다닌다.

배낭만 봤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인생선배. 이분들처럼 사이 좋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말라야에 있는 파라다이스 롯지. 독일 노부부 덕분에 진짜 파라다이스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해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다 갑자기 눈을 만났다. 바로 앞에 있는 쓰러져 가는 롯지에 들어갔는데 이름이 파라다이스였다. 첫 번째 손님이었다. 난로에서 손을 녹이다 보니, 건장한 두 사람이 커다란 배낭을 지고 들어왔다. 꽁꽁 싸맨 재킷을 벗을 때까지는 몰랐다. 일흔에 가까운 노부부일 줄이야. 함께 난로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산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 경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포터도 가이드도 없이 1년 중 한 달은 히말라야를 여행한다고 했다. 감기 때문에 연신 콜록거리는 할아버지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할머니,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장난을 치는 할아버지.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그때 그런 바람이 생겼던 것 같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늙고 싶다는 생각.

함께 걸어 더 즐거웠던 올레길 (1).

함께 걸어 더 즐거웠던 올레길 (2).

다시 올레길. 마음과 몸을 비우기 위한 길이었는데, 비울 틈이 없었다. 함께 걸은 일행들이 어찌나 따뜻하고 재미있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를 나누느라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점심때는 피크닉 온 것처럼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가방에서 시시때때로 나오는 간식 덕분에 마음뿐만 아니라 배도 비울 수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 올레길 랄랄라.

함께 걸어 더욱 따스하게 다가왔던 올레길.

종착지가 500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깜짝 놀랬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행복에 젖어 걷다 보니, 500m 밖에 남지 않았단다. 믿기지 않았다. 10.5km가 이렇게 짧다니. ‘그래, 함께란 이런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 귀퉁이에 남아있던 걱정거리 한 조각이 툭 하니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만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감사한 일. 내일 버진로드를 씩씩하게 걸어 들어갈 수 있으리라.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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