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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해서 문송합니다” 각박한 세상 문과들이 던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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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해서 문송합니다” 각박한 세상 문과들이 던진 일침

입력
2017.05.2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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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아니면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글로 살아가리라”

2014년 12월 25일 문예창작과 실기시험을 한 달 앞둔 재수생 김하원(23∙필명)씨는 ‘성탄 유서’를 썼다. 글쟁이의 꿈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꾹 눌러 담았다. 김씨는 벅찬 마음을 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인문학적 개소리’(이하 인문개)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개설했다. 평소였으면 ‘개소리 하지마’란 핀잔을 들었을 심오한 글들을 이곳에 꾸준히 올렸다. 주로 유명 철학자나 작가의 관점으로 현실을 비평하고 풍자하는 식이다. 처음 세 명 남짓했던 페이지 구독자 수는 어느 새 1만 4,000명을 돌파했다.

꽃 길만 걷고 싶다만 기나긴 가시 밭 길이 펼쳐진 게 대한민국 문과생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꽃 길만 걷고 싶다만 기나긴 가시 밭 길이 펼쳐진 게 대한민국 문과생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2년 6개월 전 한 재수생의 절망에서 탄생한 인문개는 현재 15명의 대학생이 함께 꾸리고 있다. 비슷한 시기인 2015년 11월 페이스북에 개설된 페이지 ‘철학개그’도 있다. 철학개그의 구독자는 2만 1,000명이 넘는다. 철학개그의 게시물은 현실냉소적인 성격의 글이 많다. 지난 해 10월 말 촉발된 국정 농단 사태의 영향으로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는 글이 많다.

이들의 인기 배경엔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문과 대학생들의 자조적 현실인식이 깔려있다. 11.2%(4월 기준)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률에 좁은 취업 문을 두고 서로 다투는 인문계 전공생들은 전공이 취업에 쓸모 없다고 절망한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 문과생에게 인문개와 철학개그는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무기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위로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인문학의 쓸모’를 전파 중인 인문개의 필진 3명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2015년 11월 철학을 전공한 김희림(23)씨와 그의 친구들은 데카르트를 소재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우리끼리만 웃지 말고 다 같이 웃자’는 취지로 철학 개그 페이지를 만들었다. 주로 궤변이나 철학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분석한다. 철학개그 캡처
2015년 11월 철학을 전공한 김희림(23)씨와 그의 친구들은 데카르트를 소재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우리끼리만 웃지 말고 다 같이 웃자’는 취지로 철학 개그 페이지를 만들었다. 주로 궤변이나 철학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분석한다. 철학개그 캡처
철학개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됐던 지난 3월 10일 "왕이 큰 잘못을 범하면 간하고, 여러 차례 간해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바꾼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철학개그 캡처
철학개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됐던 지난 3월 10일 "왕이 큰 잘못을 범하면 간하고, 여러 차례 간해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바꾼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철학개그 캡처

▦김하원(23ㆍ이하 김) = 인문학적 개소리 페이지를 만든 문예창작 전공 대학생. 김하원은 김환수씨가 처음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김씨는 캠퍼스 대신 재수 생활에 쏟았던 스무 살에 대한 회한과 열등감을 이 캐릭터에 투영했다.

▦탄환(21)= 신문방송학과 학생.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하나인 ‘탄환’이론 에서 따온 필명으로 자신의 개소리가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 가슴에 총알처럼 박혔으면 좋겠단 염원을 담았다.

▦권명(21) = 국어국문학도. 실명의 이름자가 다 빛을 뜻하는 한자라 한 글자로 줄여 밝을 명으로 쓴다. 성씨와 이름을 합쳐 ‘권명’이라고 명명한 것. 문학이 세상을 밝혀줄 등불이라고 믿고 훗날 소설가나 편집자가 되길 꿈꾼다.

인문학?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죠

Q. 왜 페이지 이름이 ‘인문학적 개소리’인가?

A. 김=“처음엔 ‘야매 인문학’이라고 지었는데 사람들이 근본 없는 말을 ‘개소리’라고 치부하는 게 떠올랐다. 학문의 엄정한 성격을 피해가면서 발랄한 느낌을 주고 싶어 인문학적 개소리라고 명명했다”

Q. 활동하게 된 계기는?

A. 김=“문과다운 농담을 자유로이 주고받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출발했다. ‘모든 뛰어난 작품에는 저마다의 윤리가 있다’고 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저마다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했으면 한다”

탄환=“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배척 당한 경험이 있다. 사회문화 시간에 선생님께 ‘구조의 모순’에 대해 질문하다가 혼나기 일쑤였고 학교에서 디제잉을 연습하다가 ‘관심 종자’로 낙인 찍혔다. 인문개는 학창시절 억압받았던 목소리를 표출 할 수 있는 창구다.”

권명= “나는 개소리 백일장을 통해 발탁됐다. 당시 먹고 살기 힘들어도 인문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인문학도의 애환을 담은 글을 썼었다. 지금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 다른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볼 겸 활동에 임하고 있다.”

Q. 개소리 백일장이 뭔가?

A. 김= 페이지 구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 경연대회다. 페이지 구독자 만 명 돌파 기념으로 지난 달 말에 실시했고 20명 넘는 인원이 참가했었다. 백일장을 정기 행사로 정착 시킬지는 현재 논의 중이다.

Q. 현실에선 인문학이 외면 받고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A. 권명= “아무래도 취업 때문이 아닐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나만해도 지방대 출신에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먹이 사슬 최하단에 있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께서도 교육공무원이 돼라 종용하신다”

모두 마음속에 ‘개소리’ 하나쯤은 품고 있잖아요?

“Just be you” 인문개 멤버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관점으로 글 쓰는 것을 지향한다.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Just be you” 인문개 멤버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관점으로 글 쓰는 것을 지향한다.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교묘한 비틀기로 통념을 깨는 인문개의 게시물.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교묘한 비틀기로 통념을 깨는 인문개의 게시물.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Q. 근데 인문학을 내세운 이 페이지가 인기다.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A. 김= “정상이라고 정해놓은 기준에 억눌린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나도 댓글을 보면서 개소리를 하고 하는 열망이 이토록 뜨거운지 새삼 놀란다. 그만큼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인문학은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 되어주고”

탄환= “동의한다. ‘내가 이만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줄 안다’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적잖다. 나도 마찬가지고”

Q. 글의 소재가 다양하고 이슈에 맞춰 자주 올라오는데 비결은?

A. 김=“계획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인터넷을 보다가 재미있는 사진이나 현상을 발견하면 즉각 쓴다”

권명= “나 같은 경우 학교에서 보고 배운걸 글에 활용한다. 학부생의 비명이랄까”

권명씨의 게시글과 이에 달린 성의 있는 댓글.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권명씨의 게시글과 이에 달린 성의 있는 댓글. 인문학적 개소리 캡처

Q. 인상 깊었던 댓글이나 게시물이 있다면?

A. 권명= “예전에 긴 글을 소리 나는 대로 쓴 ‘맞춤뻐브 중요썽’이란 글을 올렸었는데 이걸 본음 이론에 맞춰 그대로 다시 쓴 사람이 있었다. 내 글을 오롯이 읽는 것 같아 뿌듯했다.

Q. 이 땅의 문과들과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김= “힘들 때 절망하고 슬퍼하되 결코 세상의 냉소와 논리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절망을 씹고, 뜯고, 분석하려 들지 않고 같이 느끼고 슬퍼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연대하며 함께 발전한다고 믿는다.”

탄환=“남달라 보이고픈 욕망, 낯설게 보기가 존중 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주류에 대한 맹신이 타파됐으면 한다. 인문학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줄 것이다.”

권명 =“흔히들 인문학은 실용성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건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적 삶의 기준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인문학도 실용가치가 있다. 사람과 생각을 공부하는 인문학을 통해 세계관을 넓히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가치가 아닐까?”

진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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