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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영화계의 '어이순실'

입력
2016.12.0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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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여느 해와 달리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최재명 인턴기자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여느 해와 달리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최재명 인턴기자

국내 기자가 질문을 하는 동안이나 그가 답한 내용을 통역사가 전할 때 그는 스마트폰 화면에 얼굴을 고정했다. 2009년 만난 미국 애니메이션 명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최고경영자(CEO) 제프리 카젠버그의 첫 인상은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4년 뒤인 2013년 10월 재회한 카젠버그는 너무나도 달랐다.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다. 기자간담회가 끝난 뒤 국내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까지 했다. 그는 “내 친구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이라며 CJ그룹 오너 가족과의 돈독한 관계를 강조했다.

카젠버그는 CJ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포럼이라는 급조된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고,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이재현 회장이 횡령·배임·탈세 혐의로 구속된 뒤 세 달쯤 된 시점에 그가 방한해 한 말과 행동들에선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다. 당시 CJ의 한 관계자는 “다 아시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 회장 구속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CJ그룹이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취하는 여러 조치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미경 부회장의 경영 일선 퇴진을 종용했다는 최근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당시 CJ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나 가늠이 간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영화계의 반응은 한마디로 ‘어이순실’(어이상실과 최순실의 합성어)이다. 예전 석연치 않았던 일들을 되돌아 보며 ‘혹시 여기도 최순실이…’라는 의문을 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산국제영화제다. 부산영화제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의혹이 다시 제기된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상영 철회를 요청하고, 영화제가 이를 거부하면서 벌어진 일명 ‘부산영화제 사태’를 청와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주도하지 않았냐는 의문이다. 청와대 뒤엔 최순실씨가 있다는 확신과 함께.

지난 9일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가 공개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은 이런 의문에 힘을 실어준다. 비망록엔 ‘다이빙 벨-교문위-국감장에서 성토 당부(신성범 간사)’(2014년 9월 5일), ‘부산영화제-다이빙벨-이용관 집행위원장 60억 예산 지원’(9월 10일), ‘다이빙 벨 상영할 것으로 예상됨→수사(9월20일) 등의 메모가 담겨 있다. 영화계 관계자라면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메모의 연관성을 금세 파악할 수 있다. 2014년 10월 7일 국정감사장에서 박대출, 서용교 새누리당 의원이 ‘다이빙 벨’의 부산영화제 상영을 질타했고, 부산시는 시비 60억원 지원을 무기 삼아 부산영화제를 압박했다. 이용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돼 지난 10월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한 영화수입사 대표는 “짧은 시간에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급성장한 비결이 궁금하다던 해외 영화인들이 이제는 부산영화제의 추락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충무로에선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에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지난 10월 경기 남양주종합촬영소를 부영건설에 매각하자 영화인들 사이에서 수상쩍다는 말들이 나왔다. 상수도보호구역에 위치한 남양주종합촬영소의 용도를 변경해주고 매각 대금 1,100억원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최순실 일당의 의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매각은 2013년부터 15차례나 유찰된, 영진위의 숙원 사업이었다. 매각 대금의 용처는 법에 따라 정해져 있다. 그런데도 의혹이 거듭 제기되는 이유는 정부가 신뢰를 잃어서다.

아마 영화계 ‘어이순실’의 백미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게이트의 내용일 것이다. 최씨의 국정농단이 알려진 10월쯤 영화인들은 “이보다 더한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시나리오 쓰지 못 하겠다”는 우스개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젠 현실에 압도돼 이런 농 섞인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카젠버그가 한국의 시국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를 다시 만난다면 얼굴이 빨개질 듯하다.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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