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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칼럼] 대통령 반성문을 보고 싶다

입력
2014.04.2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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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책상 앞에는 이렇게 쓰인 명패가 놓여있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 문구를 되새겼다. 국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최종 책임자가 바로 대통령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대통령 몫이라고 여겼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노스웨스트항공 여객기 테러 기도 사건 책임공방이 일자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그는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다. 시스템이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남의 나라 들먹일 것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 발생 사흘 뒤 인수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정치하는 사람들과 지도자로 칭하는 사람들은 죄인 느낌을 가지고 일을 대해 왔는데 내 심정도 그렇다”며 “부끄럽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선자 신분인데도 그랬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닷새 후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정부 위기대응 시스템과 초동 대처에 반성해야 한다. 눈치만 보는 공무원은 반드시 퇴출시키겠다”고 강도 높은 질책을 쏟아냈다. 그러나 국정 책임자로서의 사과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정부가 위기에 닥쳤을 때 공무원들을 꾸짖으며 정작 자신과 청와대의 책임은 피해가는 특유의 ‘제3자 화법’을 되풀이했다.

박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하다. 웬만하면 대리사과를 시키거나 자신이 사과하더라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야 나선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 때 사과한 사람은 홍보수석이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포기에 대해 사과한 것도 공약을 한 대통령이 아니라 여당 원내대표였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다음날 총리가 사과했다.

대통령이 마치 정부와는 별개의 존재인 듯 처신하는 이런 모습에 국민은 당혹감을 느낀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의 여왕을 모시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4항은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고 돼있다. 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 대통령은 영국의 여왕도 아니고 일본의 천황도 아니다. 외신들도 이런 기이한 모습을 꼬집었다. 영국 가디언은 “서양국가에서 국가적 비극에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하고도 신용과 지위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에서 국민안전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재난관리 일원화를 위한 통합시스템 구축은 바로 박 대통령의 공약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실제 상황에서 무용지물임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청와대와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서 느꼈을 관료들에 대한 배신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수족같이 따르던 관료들만 믿고 맡기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하며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을 게다. 관료 개개인의 자질은 뛰어나지만 집단으로서의 관료조직은 철저히 조직의 이해와 논리에 충실하다. 절대로 책임질 일은 하지 않는 게 그들의 생리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산업화를 이끈 주역인 관료의 전문성과 헌신에만 꽂혀 ‘암 덩어리’로 변질된 관료조직의 실상을 간과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관료조직의 속성을 꿰뚫어보지 못한 것도 대통령이고 무능한 장관을 뽑아 윗사람 눈치만 보는 허수아비로 만든 것도 바로 대통령이다. 총리, 장관에게 권한은 주지 않고 책임만 아래로 떠 넘긴 게 누군가. 대통령 입만 바라보게 하고 장관들을 받아쓰기 잘하는 학생으로 만든 게 누군가.

경기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 입구 메모판에는 어른들이 쓴 수백 여장의 쪽지와 편지 등 반성문이 빼곡히 붙어있다. “못난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나쁜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행복해라.” “무능한 정부와 무책임한 어른들 때문에 너희가 희생됐다.” 이 땅의 어른들은 모두 반성문을 쓰고 있다. 이제 대통령이 반성문을 써야 할 차례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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