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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입력
2017.03.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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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10

도쿄 대공습 직후 모습. 미군은 1945년 3월 10일 새벽 4시간여 동안 2,400여 톤의 소이탄을 퍼부었다. 자료사진
도쿄 대공습 직후 모습. 미군은 1945년 3월 10일 새벽 4시간여 동안 2,400여 톤의 소이탄을 퍼부었다. 자료사진

소이탄(燒夷彈)은 화염으로 적을 공격하는 폭탄이다. 폭발 충격파와 파편으로 전차의 철갑이나 벙커, 인체 등을 손상시키는 일반적인 폭탄과 달리 글리세린 등 강력한 인화성 물질을 담고 있는 소이탄은 화염으로 대상을 녹이고 불태운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밀림을 초토화하기 위해 퍼부은 네이팜탄이 대표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화염병일 것이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이륙한 미군의 B-29 슈퍼포트리스 전략폭격기에 실려 있던 폭탄이 그거였다. 각 7톤의 소이탄을 실은 10톤짜리 B-29가 무려 344기나 떴다. 그들이 향한 곳이 일본 수도 도쿄(東京)였다. 자정이 갓 지난 시각부터 공습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린 새벽 5시까지 도쿄 전역에는 2,400여 톤의 소이탄이 불벼락처럼 쏟아졌다. 당일 10만여 명, 중상을 입고 이어 숨진 이들까지 치면 15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쿄 대공습은 이오시마 전투(45.2.16~3.25)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이 본토 상륙전을 앞두고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벌인 무차별 살육전이었다. 그 전에도 공중 폭격은 있었지만 군수시설 등을 노린 정밀타격 위주의 제한적 공습이었고, 그나마도 고고도 폭격이어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태평양 전선의 제21전략폭격사령관으로 갓 취임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일본군 방공포대의 공격을 감수한 야간 저고도 융단폭격 전술을 선택했다. 작전지역의 군인-민간인, 군수시설-민간 시설을 불문하고 살육ㆍ초토화한다는 전술. 그가 부하들에게 했다는 말은 물론 일부 사실이었을 것이다.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보노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개스킷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기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그 부품들을 모아 가는 거다.” 한 마디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거였다. 스즈키의 아내도 아이들도 그 논리 안에서는 완벽하게 무고할 수 없었다.

그 공격에도, 또 다음날 나고야, 13일 오사카 등으로 이어진 소이탄 전략폭격에도 일제는 항복하지 않았다. 그 끝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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