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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국회 무력화는 괜찮은가

입력
2015.06.0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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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국회법 개정에 대한 청와대의 비판이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은 마비되고 정부는 무기력해질 것”이라며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할 뜻을 밝혔다. 국회가 정부 위에 군림해 손발을 묶으려 한다는 비난이다. 그런데 의아하기 짝이 없다. ‘법 취지에 맞지 않는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정부에 수정을 요구하도록’ 개정한 국회법이 위헌이야 아니냐를 따지기 앞서, ‘법 취지에 맞지 않는 시행령’이 당연히 위헌이라는 사실은 왜 문제삼지 않는 것일까.

헌법 정신에 따라 시행령은 모법을 위반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현실에선 상위법이 위임하지 않은 내용을 시행령에서 규정하거나 입법 취지와 어긋나게 제정함으로써 행정부가 월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다. 정부가 조사의 대상인 이 사건은 민간 주도의 독립적 위원회가 진상규명을 이끌어야 마땅하나 시행령으로 위원회 조직과 운영권한을 축소함으로써 조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어렵게 됐다. 여야 합의로 제정된 특별법의 취지를 심각하게 위반한다. 특별조사위원회 위원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행령 폐기를 주장해 온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입법 취지에 맞게 시행령을 근본적으로 되돌리지 않고, 유가족이 요구한 10가지 중 7가지를 수용했다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이렇게 국회의 입법 권한이 정부의 시행령으로 무력화됐다.

최근 정부가 노조의 동의 없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지침을 추진해 근로기준법 위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정부의 월권을 보여주는 사례다. 수십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4대강 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시행할 수 있었던 것도 국가재정법을 위배한 시행령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정부의 편의주의적 밀어붙이기와 국회의 무능이 결합돼 일어난다. 국회의원들이 법안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지역 표밭 다지기에만 급급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국회 표결은 의미가 있다. 수백명 국회의원들의 논의를 몇몇 관료들의 작위로 대체해 버릴 경우 자칫 국민의 권리 침해나 막대한 혈세 낭비, 간혹 엄청난 부패비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시행령, 즉 견제 없는 권력의 폐해다.

더욱이 대통령부터 입법부를 무시하고 누르려 하는 언행은 심각한 문제다. 여야가 공무원연금법 개혁과 함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기로 합의했을 때 박 대통령은 “공무원연금법 처리를 먼저 하고 국민연금 제도 변경은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반대했고 1,700조원의 세금폭탄이 떨어질 것이라는 과장된 반박이 청와대에서 나왔다. 어찌됐든 국민의 대리자들이 뜻을 모았건만 이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간 십상시 문건은 “찌라시”, 성완종 사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면”이 문제라며 번번이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던 대통령이 이제 입법부마저 공격하고 일일이 지침을 내리는 지경이니 이러다간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서까지 토를 다는 상황이 오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개정 국회법의 위헌성 여부로 돌아가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소 엇갈리나 위헌성이 인정될 소지도 있다고 본다. 목적이 좋아도 절차상 남용될 여지가 있다면 이를 제한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법을 위배한 시행령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우리나라는 말로만 삼권분립이었을 뿐 대통령의 권한은 말 그대로 제왕적이었다. 이후 문민화 과정은 그 불균형을 바로잡고 삼권의 견제와 균형 위에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과정이었다. 또한 대통령제 국가의 의회답지 않게 정부에도 법안제출권을 부여하고,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심사 수정할 뿐 자체적으로 비목을 신설하지 못하는 등의 권한 제약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대체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국회의 능력과 권한을 키우는 게 더 시급하다. 문제는 정부의 무기력화가 아니라 국회의 무기력화다.

김희원 문화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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