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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남작

입력
2017.04.2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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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4.21

1차대전 파일럿의 전설이 된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1918년 오늘 숨졌다.
1차대전 파일럿의 전설이 된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1918년 오늘 숨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제공권은 1917년 영국의 브리스톨 파이터, 솝위드 카멜, 프랑스의 스파드8 등 신예(?) 전투기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연합국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한다. 독일이 전세를 뒤엎고자 기존 복엽기 ‘알바트로스’를 개량해 야심 차게 투입한 신예기가 포커 Dr.1 삼엽기였다. 8미리 후미 기관총 두 정을 장착하고 상승력 등 기동능력을 향상시킨 이 기종과 더불어 1차대전의 전설이 된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 1892~1918)이 탄생했다.

남작가에서 태어나 독일 육군 기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리히트호펜은 이듬해 육군 항공대로 전직한다.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귀족들의 기병시대가 저물던 때였다. 정찰기 후방 기총 사격수였던 그는 16년 창설된 전투전문 비행대인 ‘야스타(Jasta 2)’의 전투기 조종사로 발탁됐고, 이듬해 야스타 11 편대장으로 승진했다.

그에게 포커 Dr.1 삼엽기는 매의 발톱을 단 알바트로스였다. 과장인지 모르지만, 당시 전투기는 속도가 느려 적 파일럿의 표정까지 살피며 항공전을 폈다는 말이 있다. 광학조준기도 자동 추적장치도 없이 오직 파일럿의 비행 능력과 기총술로 전투를 벌이던 때였다. 온통 붉은 칠을 한 그의 삼엽기는 승승장구했고, 그는 붉은 남작(Der Rote Baron)이란 별명을 얻었다.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솜강 전투에 나섰다가 숨졌다. 항공전에서 패한 게 아니라, 훗날 확인된 바 연합군 진지의 대공 기관총탄에 맞은 거였다. 부상당한 채 평지에 비상 착륙한 그는 과다 출혈로 숨졌다. 기체와 함께 추락해 산화하는 것을 파일럿의 가장 화려한 최후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지만, 그는 항공전 불패의 신화와 더불어 총 80기의 격추수로 1차대전 에이스 1위 기록을 세운 뒤 자신이 사랑했던 붉은 삼엽기를 지켜냈다.

당시는 독일 패전의 기색이 하늘과 땅 모두에서 확연하던 때였다. 제국독일에겐 반전의 부적 같았던 그의 활약이 끝나면서 가망 없는 제패의 꿈도 스러졌다. 카이저는 얼마 뒤 망명했고, 군주제 대신 공화정을 선포한 독일은 그 해 11월 항복했다.

리히트호펜의 유해가 독일로 돌아온 건 1925년이었고, 베를린 국립묘지에 묻힐 때 첫 삽을 뜬 이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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