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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후… 대한민국은 지금 ‘보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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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후… 대한민국은 지금 ‘보류 사회’

입력
2016.10.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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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하거나 오해 살 바엔 ‘일단 미루자’

사람 만나도, 안 만나도 문제… 난감해진 친분관계

당장은 편해졌지만, 일각선 ‘내 일 없어지는 건 아닌지’ 불안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 1. 절친한 선후배인 아내끼리의 인연으로 20년간 주기적 만남을 가져 온 국립대 교수 A씨와 대기업 임원 B씨. 지난 1일 외부 식당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던 이들은 서둘러 A씨의 집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식당에서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오해를 살까 우려해서다. A씨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개 사회적 지위가 있는 편인데, 당분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며 난감해 했다.

# 2. 지방 시청 공무원 C씨는 다음 주말(9일) 아들 돌잔치에 초대했던 직장 동료와 친구들에게 1일 급하게 ‘돌잔치 취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간소한 식사 모임 정도라 괜찮을 것 같았지만, 김영란법 시행 후 “공무원이 돌잔치하고 그러면 큰일난다”는 동료들의 충고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C씨는 “이럴 땐 무조건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족끼리만 하는 걸로 아내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대한민국 사회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애초 법이 목표로 했던 부정청탁과 금품수수의 빌미는 일단 외형상 급격히 줄어드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편으론 법이 허용하는 행위마저 오해를 살까 일단은 뒤로 미루고, 오랜 친분관계는 어떻게 재조정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김영란법으로 익숙했던 업무상 교류를 아예 금지 당한 이들 사이에선 자신의 역할이 혹 사라질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감지된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 후 첫 연휴를 맞아 2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결혼식장에서 검찰 직원 가족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 후 첫 연휴를 맞아 2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결혼식장에서 검찰 직원 가족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일단 보류ㆍ연기ㆍ취소’ 행렬

김영란법 시행 후 첫 주말을 맞은 1일과 2일 공직자들은 평소보다 잔뜩 몸을 움츠렸다. 일찌감치 잡혀 있던 골프 약속은 물론, 일상적인 식사 약속도 거의 취소하는 등 납작 엎드린 분위기가 역력했다. 법적으로 따지면 자기 돈을 내고 골프를 치거나 식사를 해도 문제될 게 없지만, 괜한 오해를 살 바에야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경제부처 간부는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괜히 나섰다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럴 때일수록 조용히 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류는 주말 결혼식 풍경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공무원의 결혼식이나 상가에 화환이 종적을 감추는가 하면 하객과 조문객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실제 지난 30일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현직 외교관과 언론사 기자의 결혼식엔 평소 같으면 복도를 가득 메웠을 화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 하객은 “신랑이 화환을 사양한 탓도 있겠지만 이렇게 안 보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두툼한 축의금 다발을 대신 가져왔다가 동료나 후배 결혼식장 앞에서 의심스런 눈초리에 슬쩍 돈을 빼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애매’해진 인간관계

다분히 업무적인 식사나 골프 약속, 결혼식 등이야 취소하거나 줄이면 된다지만, 지속적으로 가져 왔던 사교모임 같은 주변 사람과의 소통이 일순간 애매해진 데 대한 혼란도 적지 않다.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만남을 계속해 나가기에는 법이 제약하는 불편함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한 고위 공무원 D씨는 10년 넘게 관계를 이어 온 학교 후배인 타 부처 공무원, 대기업 임원을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김영란법을 감안해 1인당 3만원까지는 선배인 자기가 내고 나머지 금액은 ‘N분의 1’씩 계산하고 일어섰다. 마침 모두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자연스레 대기업 임원의 승용차를 탔지만 ‘차량 이용 비용도 식사 등 편의제공에 합산된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말았다. D씨는 “카풀도 권장하는데 이런 경우는 좀 심한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공직, 민간기업 등 다양한 직종에 일하며 일상적 만남을 가져오던 지인 모임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다. 공공기관 간부, 언론사, 기업인 등 10여명의 모임에서 총무 역할을 하는 E씨는 지난 1일 식사 자리에서 급히 회칙을 만들고 회비를 걷기로 했다. 친목모임도 공식 기준이 있어야 예외로 보는 김영란법 때문이다. E씨는 “각자 경제 사정에 따라 회비를 차등해 거두어도 되는지 애매한데 이런 것도 국민권익위원회가 유권해석을 해 주느냐”고 반문했다.

매년 10월 첫 주말에 고교 동창들과 가족 동반 모임을 10년째 해 오던 성남시 소속 공무원 F씨 역시 “당분간은 모임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지난 1일 약속을 급히 취소하기도 했다. 다음달 말 결혼을 앞둔 한 공공기관 직원은 “다음 주에 ‘결혼턱’을 내기로 했는데 하필 업무 관련된 부처에 있는 친구가 있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당장은 좋지만…

변화에 만족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간 주말도 반납한 채 공무원 등 업무 관계인을 챙겨야 했던 기업 대관 담당자나 홍보맨, 경찰 정보관 등은 최근 며칠 간을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한편으론 불안감을 드러낸다. 한 대기업 대관 담당자는 “당장이야 편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리 일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앞으로 상황을 봐야겠지만 불안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세종=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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