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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우리의 육식이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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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우리의 육식이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입력
2017.09.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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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능력이 없는 동물을 기절시켜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다면 윤리적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발생하는 거리낌은 감정의 문제이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지 능력이 없는 동물을 기절시켜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다면 윤리적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발생하는 거리낌은 감정의 문제이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이른바 ‘윤리적 육식’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윤리적 육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윤리적 육식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하고자 한다.

일단 윤리는 취향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러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서 내가 딸기맛을 골랐다고 해도 윤리적 문제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나의 선택으로 피해를 입는 존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아주 독특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가령 아이스크림을 녹여서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독특한 취향일 뿐이고 윤리의 문제는 아니다.

또 다른 예시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고대 페르시아의 왕인 다리우스가 죽은 조상의 시신을 먹는 칼라시아족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리우스 왕이 칼라시아 사람들에게 죽은 조상을 먹는 대신 화장을 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랬더니 칼라시아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제발 그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도 시신을 먹느냐, 화장하느냐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물론 '완벽히' 취향의 문제라고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 문화 사람들이 자신도 죽으면 먹힌다는 것에 동의해야 하고, 동종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생기는 질병도 없어야 하고,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신을 먹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겠지만 그런 느낌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행위는 취향의 문제로 윤리와 다르다. 하지만 내 행위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끼칠 때는 윤리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행위는 취향의 문제로 윤리와 다르다. 하지만 내 행위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끼칠 때는 윤리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끼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손해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손해를 원하지 않는 존재에게 끼칠 때는 윤리가 개입된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누군가 나에게 한다면 싫듯이 누군가 싫어하는 일을 그 존재에게 한다면 당연히 싫을 것이다. 역지사지가 윤리의 기본이다. 그 다른 존재가 사람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괴롭히는 것을 싫어하는데 괴롭히는 것은 비윤리적 행동이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생명 중에서 싫어함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풀을 뜯거나 때린다고 해서 그 존재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싫어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이비 과학의 주장일 뿐이다. 물론 이유 없이 풀을 꺾거나 하등 동물을 괴롭히는 행동이 윤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동이 모이면 생태계가 파괴되니 당연히 비윤리적이다. 다만 생태계가 아닌 식물 존재 자체에게 고통을 주는 피해는 없다는 것이다.

'싫어함'을 느끼지 못하는 풀을 뜯는 것은 비윤리적이지 않다. 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싫어함'을 느끼지 못하는 풀을 뜯는 것은 비윤리적이지 않다. 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가 먹는 소나 돼지나 닭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없는 것도 아닌데, 고통을 주며 육식을 하는 것은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그런데 기절을 시켜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다면 문제가 될까? 소나 돼지는 도살장에 들어갈 때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다고 한다. 그러니 고통 없이 죽인다고 해도 죽임 이전에 공포를 주니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그런 인지 능력이 없는 동물이라면 기절을 시켜 고통 없이 죽일 수만 있다면 윤리적 문제가 안 생길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식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고기를 먹는 것에 거리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감정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현실에서 윤리적인 육식은 쉽지 않다. 마트에서 사는 고기가, 식당에서 먹는 고기가 공포도 받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고 죽었을 가능성은 제로이기 때문이다. '옥자'의 미자네처럼 닭을 자유롭게 놓아 길러도 고통 없이 죽이는 도살장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닭 백숙은 아마 목을 비틀어 잡은 닭으로 만들었을 테니 말이다. 여전히 우리의 육식은 비윤리적이다.

최훈 강원대 교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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