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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스타예감] '살인의 추억' 김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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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스타예감] '살인의 추억' 김상경

입력
2003.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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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김상경(31)은 홍상수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홍상수 감독이 누구지?" "있잖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오! 수정' 만든" " 그래? '돼지가…'는 하도 제목이 이상해서 비디오로 봤다. 제목만큼 영화도 독특하던데, 한번 만나 보지 뭐" 기가 막혔다. 시나리오가 없단다. 연극을 하다가 4년 전 드라마로 와서 '홍국영'으로 스타일을 조금 구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나가던 김상경. 그동안 "정말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 아니면 안 한다"면서 여러 편을 꼼꼼히 읽어보고는 모두 퇴짜를 놓았는데 막상 시나리오도 없는 영화에 출연이라니, 그것도 데뷔작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만나 얘기하면서 이 사람이 나를 바꾸고, 나에게 뭔가 새로운 걸 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그의 느낌은 적중했다. 촬영이 있는 날이면 밤새 요리조리 궁리하고 고민하는 그였다. 그런데 연습도 필요 없고, 매일 술 먹고 실컷 잠만 잤다. 그리고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그날 촬영할 시나리오 받아 본능적으로 연기했다. 몸무게가 92㎏까지 늘었다. 어느새 홍상수 감독을 닮아버린 그는 그 무겁고 게으른 모습으로 관객들이 짜증날 만큼 일상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표현했다. '생활의 발견'은 김상경이라는 놀라운 '배우의 발견'이기도 했다. 김상경이 얼마나 그 영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면 빠져 나오는 데 한 달이나 걸렸을까.

운명은 거듭되는 걸까. 두번째 영화 역시 홍상수 감독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대뜸 "내가 좋아하는 후배로 봉준호 감독이라고 있는데 만나보고 싶어하니까 만나 봐라. 두 번째 영화로 좋을 거다" "시나리오 읽어봤어요?" "아니"

도대체 뭘 믿고 저럴까. 의문은 봉준호 감독을 만난 날 밤에 바로 풀렸다. 이번에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나리오가 결정적이었다. '생활의 발견' 후 밀려드는 시나리오 대부분을 반도 못 읽고 포기하곤 했는데 내리 두 번을 읽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새벽에 봉준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화가 많이 난다'고 했지요. 감독은 자기도 그런 마음이라고 하더라구요."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 은 이렇게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6개월째, 이번에는 몸무게를 8㎏를 뺀 야윈 얼굴로 17년 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던 그때의 형사 서태윤으로 살고 있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내가 서태윤" 이라고 생각했다. "육감에 의존하는 시골형사 박두만(송강호)에게는 그래도 강호 형의 이미지가 조금 느껴지는데, 서태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인물… 감독이 그 때문에 나를 선택한 건지도 모르죠. 이미 만들어진 인물보다 힘들지만 이런 역이 더 매력이 있어요."

상투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는 사건 소식을 듣고 특별수사본부에 자원해서 내려 온 서울시경 소속의 형사는 '이럴 것' 이란 예상을 처음부터 부숴버렸다.

"깔끔한 강남경찰서 형사도 있지만, 털털한 점퍼 차림의 영등포경찰서 형사도 있습니다. 그래도 꼼꼼하고 논리적이며 증거를 중시하는 그런 형사지요. 박두만 역시 무식하고 실수 투성이지만 명석한 면이 있습니다. 송강호―김상경의 조합도 재미있고요. 두 명의 형사가 나오면 으레 똘똘이―멍청이로 나뉘어지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새로운 모습이죠."

이미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살인의 추억' 예고편에서도 그런 느낌은 감지된다. 끝없이 달려드는 다혈질 송강호를 맞받아치지도, 그렇다고 엉뚱하게 대응하지도 않고 무시하면서 이따금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김상경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좋은 영화가 되려면 내가 올라 타서도 안 되지만 밀려서도 안 되죠."

촬영이 없는 날인데도 무척 피곤한 표정이다. 살인사건이 꼭 비 오는 날에 일어나 살수차가 뿌리는 '겨울비'를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당시 형사들이 느꼈을 짜증과 울화,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었다. 피해자들의 공포,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정말 분노의 눈물이 솟아나고 영화지만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듯 영화 속의 서태윤 형사도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다. 그것으로 김상경은 관객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망각하지 말자는 것이죠.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응징'의 시작이 아닐까요."

세 번의 촬영이 남았는데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분노에 떨며 고통스러워 하는 김상경을 보면 관객들도 비슷한 마음이 될 것 같다. 김상경 역시 '생활의 발견'에서 그랬듯 이 영화를 마치고도 한동안 서태윤의 그림자를 쉽게 벗어 던지지 못할 것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 "살인의 추억"은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봉준호 감독에게도 두 번째 영화. 1986년부터 6년간 10명이 희생된 미궁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작인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와요'와 관련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2월초 촬영이 끝나고 5월쯤 개봉할 예정으로 네티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영화 1위에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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