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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한국 외교, 열정과 냉정사이'

입력
2015.03.2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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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애국심을 버려라.’

애국심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주장하면 강한 공격을 받게 된다. 가까운 사례가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이다. 셔먼 차관은 지난달 27일 워싱턴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에서 “한국과 중국이 소위 ‘위안부’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쟁하고 있다”며 “이해는 가지만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또 “동북아 역내에서 민족감정이 이용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에서 금세 비판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 났다. 사사건건 의견이 엇갈리던 보수ㆍ진보 구별도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의 아버지’로 여기거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포용론’을 소중하게 여기는 시민 모두 미국이 일본을 편든다고 성토했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편협한 애국심을 버리라’고 외치고도 환대를 받고 영웅이 된 사람도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주인공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13년 전 한국인들은 ‘희동구’라는 이름까지 붙여줬고, 사회 전반에 ‘히딩크 리더십’열풍이 불었다.

국제 축구계의 변방이던 한국을 감독 취임 2년 만에 세계 4강으로 바꾼 비결이 뭐냐가 핵심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등 주요 기관과 학자들이 잇따라 연구물을 내놓았다. ▦연고ㆍ파벌을 배제한 실력위주 선수 선발 ▦여론에 영합하지 않은 원칙과 규율 등이 성공 요인으로 꼽혔다. 히딩크 리더십의 핵심은 편협한 애사심이나 애국주의 타파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딩크가 차범근과 달랐던 건 연고ㆍ파벌, 여론의 영향력 등 토종 감독은 극복하기 어려웠던 장애물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차 전 감독도 “98년 축구협회는 매스컴을 비롯해 주위 견해를 수용하라는 입장이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편협한 애국심을 버리라’는 히딩크 방식을 한일 역사갈등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들끓는 여론 탓에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국내에서도 많은 전문가들은 셔먼 발언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게 현명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민족주의적 과잉반응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익을 명분으로 과거를 따지지 말라는 셔먼식 해법이 국민 감정에 맞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맹목적으로 타협을 거절하는 열정만으로는 일본 사회와 미국 정부를 납득시킬 수 없다는 논리다.

시각을 조금 바꾸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한국 외교의 입지를 높여준 은인일 수 있다. 집권 이래 아베 총리는 역사 퇴행적 발언으로 한일 관계를 주도적으로 망쳐왔다. 미 의회 사정에 정통한 크리스 넬슨은 “아베 발언은 자충수로 작용했다. 일본 외교관들로 하여금 미국 행정부 우려가 깊어지는 걸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한ㆍ미ㆍ일 공조’요구에 한국이 일본을 핑계로 확답을 미룰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미국 상ㆍ하원 합동연설이 확정됐다. ‘외교전에서 일본에 밀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방위협력지침 개정 등 선물에도 불구, 미국 의회가 아베 총리에게 과거사에 대한 진전된 입장 표명을 요구한 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승패 논란보다 중요한 건 아베 총리의 메시지다. 평소 행적으로 보건대 미국은 만족하지만 우리 눈높이에는 부족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화해를 권유하지만 국민 감정은 들끓는, 우리 정부로서는 곤혹스럽지만 전략적 결단이 필요한 상황도 예상된다.

국민 여론이 민족주의적 ‘열정’과 국제정치적 ‘냉정’사이의 균형점 부근에 머물 수 있도록 박근혜 대통령과 외교ㆍ안보 참모들의 선제적 노력이 필요한 때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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