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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에 일부러 ‘흙’ 묻히고 청년을 우롱하다

입력
2016.07.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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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흙'대고 있는 흙수저들에게 멘토들은 끊임없는 '노오력'의 길을 제시했다.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흙흙청년들 스스로 길을 뚫어야 한다.
'흙흙'대고 있는 흙수저들에게 멘토들은 끊임없는 '노오력'의 길을 제시했다.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흙흙청년들 스스로 길을 뚫어야 한다.

‘흙’이라는 1음절의 단어는 우리 사회의 분노와 혐오를 축약해내는 개념어가 됐다. 특히 ‘수저계급론’을 구성하는 핵심 단어이다. 누구나 물고 태어난다는 ‘수저’는 계급을 상징하는 단어로 부상했고, 흙은 거기에 접두사로 활용된다. 예컨대 ‘흙수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 등은 순차적으로 계급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을 청년이 만들어낸 유쾌한 용어 정도로 간단히 인식하고 소비해서는 안 된다. 청년 세대는 뒤늦게나마 자신들을 둘러싼 자기계발의 서사가 거짓이었음을 인식하고 꾸준히 대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하지만 수저계급론의 등장은 그 작업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그들의 절망을 고백하는 것이다.

흙수저와 금수저로 대비되는 수저계급론은 저마다의 수저 색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오래된 명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것이 근래에 들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론’이 된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누구나 수저의 색을 더 빛나는 것으로 바꾸기를 원하고 그것을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사회에 만연한 ’흙수저‘ 코스프레

하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진 수저의 색은 웬만한 ‘노오력’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계급 간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가 많이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아주 적은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 올라가기는 어렵고 미끄러지기는 쉽다. 그러니까, 계급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다. 그래서 정의롭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수저의 색을 바꾸거나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널리 퍼졌다. 또한 계급의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 주변에는 ‘흙’과 ‘금’이라는 가치만 존재하는 듯하다.

청년 세대는 자신들을 ‘흙의 세대’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계급 이동은 하나의 사치이고 ‘주거 공간’이라는 기본적인 삶의 사다리조차 자력으로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려받은 수저의 ‘흙’을 스스로 닦아낼 수 없고, 혹은 자신이 더 많은 ‘흙’을 묻혀 물려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청년 세대를 감싼다. 이들이 ‘흙’과 ‘수저’의 결합을 상상하고 일상화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번 정해진 계급은 거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며 자기계발로는 그 무엇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절망,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는 어떤 광기가 연출되었다. ‘흙’을 쟁취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러 후보가 자신이 바로 ‘진정한 흙수저’라며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실제로 ‘흙수저당’을 자임하는 정당도 생겨났다. 청년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역풍을 맞았다. 청년들은 그들이 정말 흙수저인지 검증에 나섰다. 해당 후보의 재산신고서를 들추어 그가 가진 아파트와 소유 주식, 그리고 보험 납부 내용까지 살폈다. 그러고서는 ‘흙수저 코스프레’를 그만두라고 외쳤다.

어느 후보는 편의점의 폐기 음식을 먹지 못 하게 하겠다는 공약을 적었지만 역시 외면 받았다. 청년들은 “폐기 음식을 먹지 못 할 것이면 편의점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편의점에서 일해 봤다면 저런 말을 하지 못 할 것”이라며 그도 흙수저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내렸다.

인터넷에 떠도는 흙수저 판별용 빙고게임
인터넷에 떠도는 흙수저 판별용 빙고게임

“청년 없는 청년세대론 이제 그만”

흙수저를 자임하며 발화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그 안에 담긴 청년 세대의 자조와 분노, 혐오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한 감각이 부족했기에 오히려 믿었던 청년 세대에게 공격 받았다. “나도 흙수저”라는 선전은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에 따라 어느 광기를 이끌어 냈다.

지난 6월에는 ‘흙흙청춘’(세창미디어)이라는 단행본이 발간되었다. 평범한 청년 10명이 직접 자신들의 삶을 담아냈다. “청년들이 빠진 청년 세대론은 끝났다”라는 선언이 인상적이다. ‘흙흙’이라는 수식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청년 세대를 ‘흙’으로 대상화하며 실제적 아픔을 조명했다.

예컨대, 자신을 잉여라고 소개한 필자는 ‘맥세권’과 ‘봉세권’ 등을 언급하며 거주지를 ‘맥도날드’나 ‘봉구스밥버거’와 같은 저렴한 패스트푸드 식당 근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냉동식품으로, 한 단계 더 뛰어 값싼 영양제를 챙겨 먹게 되는 식으로 자취의 레벨이 상승한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독립한 청년의 ‘먹고사니즘’에 대해 다루었다.

서울 상경 10년차라는 이는 자신을 ‘비공인중개사’라고 소개했다. 월세에 관해서는 거의 전문가가 되었고 “이 가격에 이런 집 또 없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이 “이 가격만 아니면 절대 살고 싶지 않은 집”이라는 의미임을 알 만한 내공이 쌓였다. 그에 더해 “공부도 해봤다”는 장에서는 청년이 스스로를 흙의 세대로 규정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도 나름의 논리를 펼친다.

그나마 희망은 흙수저들이 스스로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사례가 차츰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희망은 흙수저들이 스스로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사례가 차츰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흙흙청춘’이라는 책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청년들은 꾸준히 ‘흙흙’이라는 의성어를 사회에 던져왔다. ‘흙’이 있기 전에 ‘흙흙’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청년을 위로하고 치유하겠다고 나섰는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접근한 자칭 멘토들은 우는 모습도 아름답다고 예찬하거나, 긍정의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고 훈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는 더 울어 보았다며 자기 영광의 시대를 들이 밀었다.

노력하면 된다는 거짓에 균열 내야

청년들은 점차 그러한 거짓에 대항해 발화해 왔다. 특히 2012년에 출간된 ‘현시창’(알마)은 여러 청년 노동자들의 사례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제시하며 “이래도 청년에게 힘내라고 말할 것인가” 하고 반문했다. 작가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일간지의 기자였다. 작년에 출간된 ‘청년, 난민 되다’(코난북스) 역시 청년의 주거 문제에 대한 르포이다. 이제 멘토를 자처하던 이들은 대개 침묵한다. 이것은 그나마 청년이 거둔 성과 중 하나다.

‘흙흙’ 이후를 진지하게 탐색하던 청년들은 결국 ‘흙(수저)’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신들을 둘러싼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으나 그 역시 한번 정해진 수저처럼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흙의 세대’로 규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더 흘렸을지, 그리고 어떠한 절망감을 맛보았을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래도 더 이상 청춘 앞에 ‘흙흙’이 수식되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눈물을 닦아내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너를 둘러싼 제도가 어떠하든 ‘노오력’하면 된다, 그러다 안 되면 눈물을 닦아줄 테니 울고, 다시 ‘노오력’해라”라는 오래된 거짓에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수저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청년 세대는 이후에도 여전히 가장 흙 묻은 세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시창’의 작가는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전제하고는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창을 들라”고 고쳐 읽었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현실을 직시했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파이팅 하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웃으며 창을 겨눌 때가 되었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공동기획 :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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