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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헬조선

입력
2015.09.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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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마차'. 세폭 제단화 형식으로 왼쪽 패널은 윗쪽부터 타락 천사의 추방, 이브의 창조, 선악과의 유혹, 낙원에서의 추방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가운데 패널에는 거대한 건초 마차가 있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서민들은 마차에 오르거나 건초를 덜어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마차를 앞에서 끌고 있는 것은 동물 형상의 악마이고, 이들이 향하는 곳은 오른쪽 패널, 곧 지옥이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마차'. 세폭 제단화 형식으로 왼쪽 패널은 윗쪽부터 타락 천사의 추방, 이브의 창조, 선악과의 유혹, 낙원에서의 추방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가운데 패널에는 거대한 건초 마차가 있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서민들은 마차에 오르거나 건초를 덜어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마차를 앞에서 끌고 있는 것은 동물 형상의 악마이고, 이들이 향하는 곳은 오른쪽 패널, 곧 지옥이다.

헬조선은 젊은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 사회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인데 사회 전반의 모순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집약해서 표현하고 있다. 30년 전 젊은이들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나 식민지자본주의사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가깝게, 조선 앞에 나쁜 말을 붙인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안티조선이며, 일본에서의 일부 풍조와 비교한다면, 자국 청년 세대에 의한 혐한류라고도 볼 수 있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hell’은 게르만어 계통의 말로서 어원적 의미는 뚜껑으로 덮여진 지하세계, 혹은 동굴이다. ‘inferno’는 라틴어 계통이며 어원은 ‘infra(아래에, 아래쪽에)’와 같다. 원래 가장자리, 변두리란 뜻의 ‘limbo’는 라틴어 계통이며 그 어원적 의미는 몸통에 대한 부분, 곁가지다.

한자어 지옥(地獄)이 문헌상 가장 이르게 나온 것은 중국 24사 중 하나인, 남북조 시대의 ‘송서(宋書)’에서인데, 그 책의 천축(인도) 지역 열전에서, 산스크리트어 ‘Naraka(지옥)’를 의역한 말로 만들어졌으며 고대 힌두 사상의 종교적 세계관이 소개되는 자리에서 천당과 대비되어 쓰였다.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지옥이 중국에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소위 ‘태평천국의 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지명으로서의 조선(朝鮮)은 중국 춘추시대 제자백가서인 ‘관자(管子)’, 그리고 ‘사기’ ‘산해경’ 및 ‘상서 대전’ 등에 등장한다. 한반도의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고 나온다.

헬조선이란 말이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는 바는 ‘애국가’ 동영상의 온갖 배경 화면이 결국 이미지에 의한 사기질이며, 오히려 현재의 한국은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유명한 지옥 그림들에서와 똑같다는 것이다. 즉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어법에 따른다면, 한국 사회는 결국 ‘재벌 천국 청년 지옥’이라는 것이다.

청년 세대가 한국 사회를 지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의 극히 일부, 그러니까 상위 1%에서 10%에 해당하는 기득권층은 이것을 엄살 내지는 어리광으로 보고 있다. 노년 세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한국의 전현직 대통령들 중에서 전두환은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서”라고 했고, 비슷한 버전으로 번역한다면, 이명박은 “중소기업에서 배워보지도 않고서”, 박근혜는 “중동에 가서 일해보지도 않고서”라고 한 바 있다. 반면에 청년 세대는 이런 말들이 결국에는 열정과 노력 등과 같은 구호를 앞세워서 현실을 기만하는 것이며, 본디 청년 세대를 착취하기 위한 ‘개드립’이라고 주장한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청년 세대에게 중소기업이나 메르스 창궐 지역에서의 취업만을 권유하고 있다는 것은 대기업 및 이와 유사한 수준의 일자리에는 아무나 취직할 수 없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한 셈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는 청년 세대에게 일종의 ‘조건 만남’을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빽과 스펙 없으면 대기업 취직은 안 돼!!!”

다수의 청년 세대는 헬조선의 상황에 지친 나머지 정답은 이민이라는 식의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1988년 올림픽 하키 은메달리스트인 김순덕씨가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아이를 잃은 뒤 훈장을 우체통에 집어넣고 이민을 떠난 선례가 있다. 물론, 다수의 청년 세대는 실제로 이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얼마 전 터키 해안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이 등이 처한 현실을 놓고 본다면 이민이라는 것이 결국 로또 당첨과 같다는 것 정도는 청년 세대 다수가 이미 잘 깨우치고 있다.

청년 세대들은 일찍이 독일의 문예비평가 벤야민이 그의 대작 ‘파사겐 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현대’를 ‘지옥의 시간’이라고 묘사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현대란 자본주의 현대를 말한다. 그런데, 예컨대 ‘디시 위키’의 ‘헬조선’ 항목은 맨 앞에서 ‘한 줄 요약문’을 60개 이상씩이나 나열하고 있다. 문제는 모순들의 나열이 아니라 그 모순들을 응축시켜내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는 모순의 응축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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