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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무도 울지 않는 이별

입력
2016.07.0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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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이스북에 친구가 링크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친구가 붙인 제목은 ‘JWT 마지막 날’. 최근 폐업한 WPP계열의 외국계 광고대행사 JWT의 직원들이 자신들이 다니던 회사에서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리며 만들어 올린 영상이다. 그 속에는 JWT의 직원들이 함께한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노래 부르고 박수 치고 웃는 모습들, 한 곳을 바라보는 직원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거나 점심을 같이 먹거나 야근하는 모습… 모두 여느 광고회사와 다르지 않은 풍경들이다.

WPP그룹은 해마다 세계 광고ㆍ마케팅 기업 순위 1ㆍ2위를 다투는 대제국이다. 270여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고, 103개국 1400여개 사무소에 7만여명이 일한다. 우리나라에서 JWT는 최근까지 KT&G, 서울우유, 리드코프, 국민은행 등의 광고를 대행하며 광고회사의 취급고 순위에서 꾸준히 10위권 안에 드는 회사였다. 1위부터 5위까지의 광고대행사가 모두 대기업 계열의 인하우스 에이전시인 점을 감안하면 꽤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다. 그런 회사가 하루 아침에 문을 닫았다.

비자금을 조성해 광고주에게 뒷돈을 건넨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왔고 전ㆍ현직 대표가 구속된 것이 폐업의 원인이다. JWT 노동조합에 따르면, 회사는 지난 3월 검찰조사가 시작된 후 누차 직원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각자 업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을 약속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약속과는 다르게 폐업을 계획하였고 임원회의에서 대표이사 대리인이 6월 중 폐업할 계획을 밝힌 후에도 이를 직원들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먹튀’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직급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고 JWT는 문을 닫았다. 직원 90여명 중 해외 광고주를 담당하고 있는 20여명은 WPP의 다른 계열사로 옮겨 가고, 나머지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쉽게 재취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연차가 너무 많아도 연차가 너무 어려도 받아줄 회사는 드물다.

다시 유튜브의 ‘JWT 마지막 날’을 플레이 해 본다. 지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위로의 문자메시지도 차마 건네기 어렵다.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얼굴도 있다. 그늘 없는 업계 후배들의 마음에 상처가 될 일이 생긴 것이 광고계의 만성적인 부조리함을 참고 받아들여온 내 탓도 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

다행히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광고주가 광고대행 기회를 주는 대신 뒷돈을 달라고 했다면 나도 줬을 것이다. 골프든 비싼 식사든 향응을 원했다면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고 대행 수수료를 받은 뒤 일정 비율을 회사 차원으로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광고주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여러 회사를 불러 1차, 2차에 걸쳐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시킨 뒤에 ‘생각해 보니 아직 광고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뻔뻔스럽게 얘기하는 광고주도 겪었다. 대행 계약을 하고 시안만 수십 차례 받으면서 광고집행을 하지 않은 광고주도 보았다.

그런 황당한 갑질을 당하면서도 광고인들은 참 무던히도 참았다. 혹시나 다음 기회가 있을까 생각해서 참고, 다른 광고주한테 싸움꾼으로 소문이 날까 참고, 귀찮아서 참았다. 그 인내의 끝이 광고주한테 버림받거나 회사에서 구조조정되거나 아예 회사가 문들 닫아버리는 것이라니 내가 평생 붙들고 있는 광고라는 일이 참 쓸쓸하다.

영상은 JWT직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로 끝이 난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디서 뭐가 되든 JWT보다는 잘 됩시다.’

입사 날은 모두 다른데 똑같은 퇴사 날짜를 가지게 된 사람들, 씩씩하게 울지 않는 사람들, 애써 파이팅을 다짐하는 사람들, 업계의 내 동료이자 선배이고 후배인 그들… 그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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