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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926년생, 서울사람 김주호

입력
2017.11.17 14:2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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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늘 할아버지의 이름을 불렀거든요, 친구처럼. 사람들이 처음에 다들 놀랐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할아버지는, 엄마한테는 아버님이고 아빠한테는 아버지이고 친구 분들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분들이 거의 없었을 텐데, 제가 그렇게 부르니까 좋아하시더라고요.”

손녀는 재작년에 돌아가신 조부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까지, 세상 그 누구보다 예뻤을 손녀에게 온전한 자신의 이름 석 자로 불렸던 사람. 김주호 씨는 서울사람이다. 1926년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2015년 12월 18일에 작고했다. 향년 89세.

나는 살아생전의 그를 만난 적이 없다. 혈연으로든 지연으로든 혹은 일로든, 그와 엮일 일조차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김주호 씨의 생애와 우연히 맞닥뜨린 건 며칠 전이었다. 서울 도심에는 호젓하게 계절의 변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의외로 많이 숨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관통해 잘 가꿔진 경희궁 뜰 사이를 걸어 뒤편 울울한 나무숲으로 가는 길도 그 중 하나다. 평일 오후. 지인과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혼자 한 시간쯤 그 길을 걷기로 했다. 가을이 깊어서이기도 했고, 유난히 서늘한 기분에 빠져서이기도 했다.

역사박물관 로비로 들어서는데 전에 없던 설치물이 보였다. 다섯 평 남짓한 임시전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2019년 개관을 앞둔 시민생활사박물관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이야기로 담는다는 취지로 마련한 전시였다. ‘1926년생 서울사람 김주호’ 전은 그 첫 번째라고 했다. 김주호 씨의 학창시절을 보여주는 통신표와 상장,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과 교사로 일한 그가 오랫동안 손에 간직했을 주판과 앨범, 누렇게 변색된 월급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위쪽 벽면 가로줄에 당대의 생활사 연표와 김주호 씨의 생애가 위아래로 소개되었다. 그러니까 김주호 씨는 소설가 박경리와 코미디언 배삼룡 구봉서, 정치인 김종필과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소학교를 들어갈 무렵에는 일제의 제2차 조선교육령이 본격화된 시기여서 국어 시간에 일본어를, 국사와 지리 역시 조선이 아닌 일본의 것을 배워야 했다.

1944년 그가 경성고등상업학교(1946년 서울대 상과대학으로 변경)에 입학하던 해에는 서울인구조사가 있었다. 당시 서울에 사는 사람은 947,630명, 현재의 10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첫 직장인 은행에서 받은 월급봉투도 보였다. 초봉 3,940원, 그때 물가로 환산해보니 쌀 40㎏, 소주 아홉 되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던 그가 일반 직장인 월급의 절반 수준인 학교 교사가 된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교사자격증을 취득했고, 곧바로 중학교 선생님으로 교단에 섰다. 나이 서른에 접어든 이듬해에는 부모의 중매로 만난 이수범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1955년 11월 9일 화신백화점 뒤편 종로예식장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에서 신부는 흰색 한복에 면사포를 쓴 차림으로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신혼여행지는 유성온천에 있는 만년장 온천호텔이었다고 한다.

짧게 요약해 전시한 김주호 씨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전혀 모르던 누군가의 한 생애가 육화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다가오는 경험. 지나온 우리의 시간이 새로운 풍경으로 입체성을 획득하는 현장이었다. 사람 없는 간이전시실에 한동안 서 있었다. 사실은 잊힌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의 경계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하며 이 가을을 견디고 있었다. 삶의 무망함을 확인하며 마음 다스리기 적절한 공간으로 숨어들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많이 고마웠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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