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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던 몸뚱이, 감자밭에 몽땅 내던지고 나서야 "버리면 얻는구나"

입력
2015.07.0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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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바꿔 털퍼덕 주저 앉으니 느껴지는 흙의 속살… "진작 이럴 걸"

감자 캐는 필자를 보며 D동생이 감자 같다고 놀려댔다. 풀밭처럼 보이지만 감자 밭이다. 부드러운 흙 속에 손을 넣으면 동글동글 감자가 덩굴채 올라온다. 물론 잡초도 함께다. 늦여름 풀과의 한판 전쟁을 피할 순 없다.
감자 캐는 필자를 보며 D동생이 감자 같다고 놀려댔다. 풀밭처럼 보이지만 감자 밭이다. 부드러운 흙 속에 손을 넣으면 동글동글 감자가 덩굴채 올라온다. 물론 잡초도 함께다. 늦여름 풀과의 한판 전쟁을 피할 순 없다.

무당이 굿하며 방울 흔들 듯, 감자 뿌리를 털어냈다. “감자 알맹이만 남고 풀 껍데기는 가라~” 속으로 주문도 외쳤다. 장마전선이 올라온다는 예보도 있고, 하지에 맞춰 수확해서 하지감자인데 며칠 늦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맘만 급했지 몸은 전혀 급하지 않은가 보다. 당최 따라와 주질 않는다. 그래 본 적도 별로 없지만 이번만큼은 몸과 맘이 호흡이 맞았으면 했는데 나한테는 안 되는 일인가 보다.

쪼그려 앉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앉았다 일어섰다 할 때마다 ‘임신여성 빈혈증상이 이렇겠구나’ 하는 어지럼증을 겪었다. 피가 통하지 않던 장딴지에 급히 수혈하느라 머리 속까지 텅 비는 느낌이 들었고, 파란 하늘은 연두색을 거쳐 노랗게 변했다가 5초 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달랑 무릎 관절에 쌀 한 가마 몸땡이를 걸치고 버틴다는 것은 나에겐 체벌에 가까웠다. 착하게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애써 성실하게 벌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두 무릎을 땅에 댄 채 호미도 내 던지고 두 손으로 번갈아 가며 두둑을 파헤쳤다. 오체투지가 별거 있겠나. 머리는 땅에 안 닿아도 팔꿈치까지 쓰면서 이 정도 힘들게 전진하면 그게 그거지 싶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자. 30미터 두둑 13개, 400미터도 안 되는 길이를 해결 못하고 쓰러지기야 하겠는가’ 생각하며 세 번 째 두둑을 시작하는데 쓰러질 것 같았다.

작전을 바꿔 그냥 주저앉은 채로 전진했다. 다리가 편찮으신 간전댁할머니 방식이다. 가물었지만 방금 헤집은 흙의 속살은 촉촉하고 시원했다. 살짝 젖어가는 엉덩이를 땅에 끌면서 나아가니 ‘왜 진작 이러지 못 했을까. 뭐할라고 쓸데없는 내 몸을 아꼈을까’ 싶었다. 버려야 얻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현기증 없이 일어나 넷째 고랑으로 들어서려는데 가랑이가 근질근질했다. 약간은 따끔거리기도 했고, 긁어도 가라앉질 않았다. 털퍼덕 앉은 채로 작업하다 보니 아무래도 속으로 개미가 들어간 모양이다. 긁다가 쥐어 뜯다가 해도 소용없었다. 체벌을 빗겨간 것에 대한 또 다른 형벌인가. 연신 비비고 꼬집어가며 농막에 들어가 바지를 내렸다. 까만 바지 까만 살 틈에서 엄폐하고 있는 개미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작년에 보건소에서 나눠준 해충 기피제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프로야구 심판처럼 자세를 잡고 시원하게 뿌려댔다.

D동생이 약재를 끓이기 위해 압력솥을 닦고 있다. 유기농업을 하기 위해서는 농약 대신 약을 만들어서 사용하기에 용기를 깨끗이 닦는 게 중요한 일이다.
D동생이 약재를 끓이기 위해 압력솥을 닦고 있다. 유기농업을 하기 위해서는 농약 대신 약을 만들어서 사용하기에 용기를 깨끗이 닦는 게 중요한 일이다.

개미가 즉사할 만큼 뿌렸다.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한 3초 그랬다. 그 이후는 캠핑장 토치를 들이댄 듯 뜨거워졌다. 펄쩍펄쩍 뛰기만 했다. 가랑이를 벌리고 물을 바르고 선풍기를 들이대봐도 소용 없었다. 피가 나도록 긁어댄 피부에 살충제를 뿌렸으니 당연했다. 고등학교 때 지은 죄가 생각났다. 하루는 근면성실하고 순진했던 짝이 결석을 했다. 다음날 학교에 나왔지만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랜 기간 나를 피했다. 결석 전날, 가랑이에 습진이 생겼다 길래 “스프레이파스가 최고”라고 했던 것 뿐인데 많이 아팠나 보다. 응당한 대가라고 생각했지만 움직일 수 없게 아팠다.

틀어놓고 나간 라디오에선 노래가 나왔다. “베이베 베이베~알러뷰 베이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를 국산 노래에서 왜 그렇게 많이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나만 안 쓰고 살아왔나?’ 싶었지만 듣기 싫어 껐다. 시간이 지나야 화기가 가라앉을 터, 배달된 채 뜯지도 않았던 주간지를 펼쳤다. 표절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했다.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맘이 좋지 않았다. 표절이 드러날까 봐 얼마나 불안하게 살았을까 생각하니 더 안쓰러웠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는데 그 ‘알만한 사람’들은 여태까지 뭘 했던 걸까. 공범들이다.

표절을 일본에서는 도작(盜作)이라 표현한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절도가 맞다. 출판사는 장물아비니 우리 집 책꽂이엔 애써 취득한 장물들이 꽂혀있다. 도둑질도 나빴지만 변명은 더 언짢다. 작가와 출판사 책임자들이 쓰는 화법은 희한했다. 그들의 말투를 빌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다. “없지 않아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혐의를 욕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법 하다는 점을 당신들이 인정한다 해도, 그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에 치밀어 오르는 비속한 욕을 하게 되면 나의 깨끗하지 못한 육신에 입까지 더러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욕은 하지 않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신 거친 숨이라도 뱉을 수 밖에 없는 사안임을 인정하시고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도둑질과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짓은 도둑질에 해당하므로 그에 마땅한 욕을 드시는 것이 낫겠다는 소견을 마지 못해 피력하는 바입니다. 이 욕심 많은 사람들아.”

어느 기사에 보니 먹어도 살 찌지 않았으면, 늙지 않았으면, 1만년만 살았으면, 저절로 돈이 생겼으면, 뭐 이런 바람이 남녀노소에 따른 바람이라고 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은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 식 자재비가 무지하게 든다든가, 친구를 계속 새로 사귀어야 한다든가, 마지막 1천년은 ‘죽을 때가 다됐네’하며 살아야 한다든가 하는 어려움 말이다. 로또 1등 치고 제대로 생활하는 사람 없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병은 오히려 암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들었다.

비 오기 전에 얼른 남은 감자 캐야 해서 아픈 몸을 끌고 나갔다. 다시 네 발로 기는 자세로 작업에 들어갔는데 D동생이 밭으로 올라왔다. “도와드릴께라?” 짜식, 꼭 필요할 때 나타나니 미워할 수가 없다. “근디 형님, 뭔 자세가 고런다요. 고렇게 엎드리는 거 좋아 헝게 배가 튀어 나오지라” 이쯘 맘이 쏙 들어간다. ‘그러면 눕는 거 좋아하는 놈은 등이 튀어나온다냐!’ 하려다가 “그냥 이게 편해” 하고 말았다.

감자를 캐고 바로 심은 콩이 싹을 밀며 올라오고 있다. 새가 뜯어먹지 않은 잎에 검은 점 모양으로 벌레들이 자리를 잡았다.
감자를 캐고 바로 심은 콩이 싹을 밀며 올라오고 있다. 새가 뜯어먹지 않은 잎에 검은 점 모양으로 벌레들이 자리를 잡았다.

동생 덕분에 두어 두둑 수월하게 작업하고 잠시 주저앉은 채로 쉬었다. 농막에서 물병을 가져온 동생이 앉으며 말했다. “형님, 올해는 확 거시기를 쳐불까 생각도 했는디, 걍 자연농법만 하기로 했어라.” 농약 안쓰고 감 농사를 짓는데 작황이 좋지 않아 수입이 거의 없어서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잘 생각했어. 나두 혼자 하긴 힘들어. 조그만 더 해보자.” 지금까진 친환경 약재를 같이 만들어왔는데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의지할만한 친구라 ‘잘 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잘 허기는요. 형님 우린 이제 모 아니면 도여라. 작년 맹키로 조져 불면 오래 못 버텨라.” “우리한테 모가 오겄냐? 도 나와도 한 칸은 가니까 괜찮어.” “빽 도가 문제지라.” “그래도 멈춰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게 닛지.” “아따, 진짜 왜 그라신다요. 형님은 가만 보면 남성호르몬이 부족허당게. 테스테론인지 뭔지 약 좀 구해다 드려야 쓰겄네. 뭐 바라는 거 읎소?” 한숨 참고 얘기했다. “잘 죽는거.” 오랜만에 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죠 잉. 허기사 잘 죽을라고 열심히 사는 거지라.”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속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러다 늦겠다 싶어 초조해지는데 순천으로 귀농해 매실농사를 짓고 있는 형님이 불쑥 찾아오셨다. “엔진 톱 좀 빌리자~.” “형님 우리 엔진 톱 없어요. 남원 친구랑 헷갈리셨나 보네요. 오신 김에 일 좀 도와주시죠 뭐.” 양말이랑 장화를 갖다 드리니 기꺼이 쪼그려 앉으신다. “매실은 많이 파셨어요?” 구례 매실농가들은 작년보다 값이 나아졌다지만 작황이 좋지 않아 울상인 곳이 많다. “나야 없어서 못 팔았지.”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우와, 잘 나갔나 보네요. 수입도 좀 올랐어요?” “허어,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팔았다구.” 수확량이 얼마 안됐다는 말씀이었다. “근데 엔진 톱은 왜요?” “응, 매실나무 확 다 베 버릴라구.” 또 웃으셨다. 안 좋은 표정으로 쳐다보니 “괜찮어. 나 살만큼은 벌었어. 맘 편하면 됐지 뭐.”

사람들이 흔히 하는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사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잘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희한하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대부분 “맘 편한 게 최고”라는 말을 많이 하는 거다. 아무리 해 봐도 둘 다 편하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데 “몸 편한 게 최고”라는 말을 듣기 힘든 것도 희한하긴 하다.

두 사람 덕분에 비 오기 전날 감자를 모두 수확했다. 다른 농가처럼 쏟아져 나오듯 얻어내진 못했지만 항상 하는 생각대로 비슷하게 생긴 게 나온 것만도 감사했다. 3년간 해왔던 꾸러미를 중지하고 유일하게 들락거리는 SNS에 “감자 팝니다”하고 올렸더니 하루 만에 300킬로그램이 다 나갔다. 그냥 드려도 시원찮은 분들에게 돈 받고 팔아먹는다는 것에 얼굴이 화끈대기도 했다. 어쨌든 흔히 신장 개업하는 가게에서 나타나는 “오픈빨” 현상일 터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에 기쁘기보다는 덜컥 겁이 났다. ‘이게 정점일지 모르는데. 분명 의리에 이끌린 충동구매가 절반일 텐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감자를 팔기 위해서는 한알 한알 세번씩은 손이 갔고, 함께 판매한 감잎차와 어성초스킨도 아내와 간전댁할머니가 씻고 다듬고 뜨거운 솥에 여러 번씩 팔뚝 데어가며 애쓴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보내 드리고 내가 얻은 것은 모니터상의 숫자들이다. 이게 뭐길래 늘어난 칸을 보며 안심하고 기뻐하며 먹고 사는 건지.

이장 친구네 트랙터를 빌려다가 처음으로 운전도 해보고 콩 심을 밭도 갈았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콩 파종기를 가져와 200평 가까운 밭에 메주콩을 다 심었다. 넓게 심었더니 그물을 덮어 주기도 힘들고 잡새 들이 와서 파 먹든 잘라 먹든 어쩔 수 없다 싶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비가 오면 새들이 덜 날아오고 피해도 적어진다고 하셨다. 하늘이 날 도와줄 때도 있구나 싶었다.

트랙터를 다시 갖다 주고 친구와 작물 판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하우스에서 재배한 수박이 제값을 받지 못해 속상해 했다. “난 돈 들어오는 것 보다 잘 먹겠다고 맛 있다고 메시지 주면 그게 더 좋더라구. ” 하는데 친구가 말을 무 자르듯 끊었다. “얌마! 돈 안 들어오고 메시지만 받아두 그게 좋다고? 그건 아니잖어. 그리고 그것두 욕심이여!”

맞는 말이다. 욕심 없다고 말하는 것도 욕심이고, 그런 척 하는 건 더한 욕심이다. 생각해보니 하늘이 나만 도와줄 리도 없다. 별걸 다 갖다 붙여 생각했다. 건방지게 하늘 아래 혼자만 살겠나. 그냥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는 것만 욕심이라 하지 말고 들어주면 좋겠구만. 그것도 지나치다면야 할말 없고.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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