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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 “거절하려던 시나리오에 마음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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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 “거절하려던 시나리오에 마음 흔들”

입력
2017.09.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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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김현석 감독은 “직설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고도 우리 안에 잠재된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의 화법에 매료돼 연출을 맡았다”고 말했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김현석 감독은 “직설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고도 우리 안에 잠재된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의 화법에 매료돼 연출을 맡았다”고 말했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애초엔 연출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면서 거절해야 하니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아야겠다 싶었다. 친분이 두터운 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건넨 시나리오가 아니었다면 아마 읽어 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펼쳤는데 순식간에 다 읽었어요.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더군요.”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현석 감독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상영 중)의 첫 인상을 특별한 감흥으로 기억했다.

김 감독은 데뷔작 ‘YMCA 야구단’(2002)부터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스카우트’(2007)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쎄시봉’(2015)까지 대부분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왔다. 시나리오 원작자가 따로 있는 영화 연출은 내키지 않아했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그런 결심마저도 돌려세웠다. 김 감독은 “좋은 영화가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했다. 때마침 김 감독이 오랫동안 준비 중이던 중국영화가 ‘사드 문제’에 발목 잡혀 제작이 연기된 터라 시간 여유도 있었다. 악재가 도리어 또 다른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역시 임자는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올해 1월 초부터 제작에 돌입해 각색과 캐스팅, 촬영, 후반작업을 8개월 만에 끝냈다. 김 감독은 “정신 없이 달려 오느라 완벽하게 만들진 못했지만, 이야기의 미덕이 연출의 흠을 감춰준 듯하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구청 공무원 민재와 옥분 할머니의 우정이 훈훈하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아이 캔 스피크’는 구청 공무원 민재와 옥분 할머니의 우정이 훈훈하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줄거리는 소박하다. 구청 공무원들을 벌벌 떨게 하는 ‘민원왕’ 나옥분(나문희) 할머니가 깐깐한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에게 영어를 배우는 이야기다. 옥분이 늦은 나이에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건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다. 이미 알려진 대로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시작해 마지막엔 극장 안을 눈물바다로 만든다. 김 감독은 ‘스카우트’에서 야구를 소재로 삼은 휴먼코미디 안에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품어냈다. 우회적인 화법으로 묵직하게 정곡을 찌르는, 김 감독만의 재기 넘치는 연출력이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발휘된다.

“민재가 ‘하우 아 유?’라고 물으면 옥분이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라고 답합니다. ‘나는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라는 얘기인데, 역설적인 슬픔이 느껴지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자를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살아내는 존재로 그려내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김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이제서야 할머니들을 찾아 뵙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민재의 시선 안에 담았다”고 했다.

옥분을 연기한 나문희의 얼굴만 봐도 코끝이 찡해진다. 옥분과 주변 시장 상인들, 구청 공무원들이 그려내는 연대도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김 감독은 “배우의 연기에 빚을 졌다”며 “내가 잘한 일은 좋은 배우를 캐스팅한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영화는 2007년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를 모티브로 삼는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영화는 2007년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를 모티브로 삼는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배우의 발견이다. 주인공 옥분을 비롯해 슈퍼마켓 주인 진주댁(염혜란)과 족발집 젊은 사장(이상희), 위안부 활동가(김소진), 엉뚱한 공무원 아영(정연주) 등 생동감 넘치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아, 남자 영화 일색인 요즘 충무로에서 이 영화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 “감독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면 각 연주자에 잘 어울리게 악보를 편곡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김 감독은 “배우에 대한 애정”을 편곡의 원칙으로 삼았다.

“만약에 주요 캐릭터가 남자였다면 조연이라고 해도 명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다들 너무 바쁘니까. 이렇게 훌륭한 여자 배우들을 이 영화에 캐스팅할 수 있었다는 게 역설적인 행운인 셈이지요. 한국영화계가 의지가 없어서 그렇지, 여자 캐릭터로도 상업성도 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우리 배우들이 증명했다고 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가 꼭 흥행하기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다. 흥행 성과로 현실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10년 전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에서 이 영화가 출발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10년 전보다 후퇴했습니다. 이제 위안부 생존자는 서른다섯 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관심이 식지 않게, 이 영화가 조그마한 역할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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