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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독일 강제수용소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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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독일 강제수용소의 교훈

입력
2016.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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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원글이 작성된 지 2시간 만에 ‘베스트오브베스트(베오베)’에 등록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13일 현재 이 글은 조회수 3만9,000여건에 309개의 추천을 받았고 61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이 정도면 베오베에 등록된 글들 중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에 속하는 게시물입니다.

‘독일 박물관 클라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지난해 11월 jtbc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40회에서 소개됐던 독일의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관한 방송 장면을 캡처해 쭉 붙여 넣었습니다. 사실 이런 게시물은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있어 권장할 만한 방식은 아니지만 커뮤니티에서 꽤 인기가 많은 형식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3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3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글의 제목과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치 최초의 강제 수용소였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현재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가혹한 강제 노역과 대량 학살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대량 학살을 위해 ‘가스실’이 처음으로 고안된 수용소이기도 합니다. 방송에 출연한 이들은 정문에 적힌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독일어 문구를 보며, 수용소에서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벽을 보며, 당사의 참상을 짐작케 하는 전시물들을 보며, 휴일임에도 박물관을 찾은 남녀노소의 독일인 방문객들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인 출연자인 장위안은 “이런 용기가 독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위안이 말한 ‘다른 나라’에서 같은 전범 국가였던 일본을 떠올리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 게시글의 베스트 댓글 역시 “일본 보고 있나?”였습니다.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지난달 24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인근에서 위안부 협상에 반대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지난달 24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인근에서 위안부 협상에 반대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방송된 지 10개월이나 지난 내용을 담은 글에 네티즌들이 이렇게 많은 반응을 보인 이유는 지난해 말 일본이 우리나라와 맺은 위안부 협상과 그 이후 일본이 보인 후안무치한 태도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지난해 12ㆍ28합의에 따라 지난달에 10억엔을 우리나라 재단에 송금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주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합의를 실행에 옮기도록 노력해 달라”며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울화가 치미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고,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역사의 반복을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역사를 알고 거기서 교훈을 얻으려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했을까요?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1999년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되기 전까지 우리에게 베트남전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장병들이 피땀 흘려 이룬 고귀한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휴양지로 잘 알려진 다낭을 비롯한 베트남 중부 지역 곳곳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기록하고 있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고경태기자가 쓴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ㆍ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에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 중 하나인 퐁니ㆍ퐁넛 마을 사건이 생존자 및 당시 한국군 장교, 학살 후 현장을 기록한 미군 등 수많은 관련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소개돼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의 한 지역에 세워진 양민학살추모비. 한국일보 자료사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의 한 지역에 세워진 양민학살추모비. 한국일보 자료사진

책에 따르면 당시 우리 군과 정부는 이런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심지어 미군의 사건 해명 요구에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의 소행으로 추정된다’는 근거없는 답신을 보내기도 합니다. 학살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베트남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1,798km를 자전거로 종단한 이규봉 서강대 교수는 저서 ‘미안해요! 베트남’에서 “한군군이 단 한 방의 총성을 듣기만 해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의 주민 90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미국의 민간 보고서에 기록된 베트남인의 증언을 인용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1992년 베트남과 수교를 맺은 후 9년이 지난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트남 쩐득르엉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한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습니다. 베트남 중부 5개 성에 병원과 학교 건립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민학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 지원은 없었습니다.

한국군에게 무참하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이 바라는 건 소박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돈이 없어 허름하게 밖에 마련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묘를 손볼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지원해 줄 수 없겠냐는 바람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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