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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독을 차고’ 일제에 저항한 시인 김영랑

입력
2018.08.18 14:00
수정
2018.08.18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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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펴낸 김영랑 전집ㆍ평전(왼쪽)과 1949년의 김영랑 시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펴낸 김영랑 전집ㆍ평전(왼쪽)과 1949년의 김영랑 시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소리 내어 읽을수록, 담아두고 되뇔수록 아름답다. 맑은 울림, 동그란 파문을 남기며 오래오래 머문다. 시인 스스로 붙였다는 ‘영랑’이란 필명을 꼭 닮았다. 봄꽃의 애상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노래한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닿으면 그는 두말할 필요 없는 서정시의 대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김영랑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열여섯 살 나이로 3ㆍ1 운동에 몸을 던진 독립투사, 일제 말기까지 오직 ‘우리말’로만 작품을 남겼던 저항시인. 광복 73주년을 맞이한 지난 15일 영랑 김윤식(1903~1950) 선생이 사후 68년 만에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됐다. 섬세하고 유려한 시어 뒤에 가려져 있던 ‘지사’ 김영랑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김영랑 시인의 시구가 새겨진 전남 강진의 군립도서관의 시비.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영랑 시인의 시구가 새겨진 전남 강진의 군립도서관의 시비. 한국일보 자료사진

 

 열여섯, 구두 안창에 태극기를 숨기고… 

영랑 김윤식은 1902년 해마다 뜰에 모란이 피는 전라남도 강진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완고한 지주였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유학 간 그는 시대에 눈을 떴다. 암울한 현실의 울분을 홀로 삭이다 못해 처음 거리로 뛰쳐나갔던 1917년, 그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휘문의숙에서 만난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목청껏 ‘독립만세’를 외친 것.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그는 당시 하숙방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학생 신분이 감안돼 석방되긴 했으나 미행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제의 감시는 해방이 될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3ㆍ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들불처럼 번지는 만세운동의 기세에 힘입어 영랑 또한 고향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할 계획을 세운다. 서울에서 몰래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애국가 가사, 독립신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강진까지 옮겨갔다. 자금 마련을 위해 호주머니까지 탈탈 털었지만 거사 3일 전 급습한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가 연행되고 말았다. 징역 1년형에 처해져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7개월 복역 후 석방될 때까지 온몸이 망가질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풀려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임정이 있는 상해로 가겠소. 투사로서의 입지를 굳혀야 하오.” 부모의 반대로 결국 중국 행은 좌절되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동경 유학길에 올랐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동갑내기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친구가 됐던 것도 이때의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몰두했던 때도 일제에 저항한 흔적들은 곳곳서 보인다. 군국주의가 극에 달한 1930년대 말, 일본은 조선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황국신민화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목적이었다. 영랑은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김씨 성을 지켜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는 조선 이름 석자와 함께 태극 문양까지 보란 듯이 새겨 넣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형사들이 문을 두드리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치 있는 핑계를 둘러대며 형사들의 입을 막았던 것은 물론, 양복을 갖춰 입고 단발을 하라는 명령도 끝끝내 불복했다. 그는 나라를 되찾는 그날까지 단 하루도 한복을 벗지 않았다. 매일 상투머리를 했음은 물론이다.

전남 강진에 위치한 김영랑 시인의 생가.
전남 강진에 위치한 김영랑 시인의 생가.

 ‘시란 살로 새기고 피로 쓰는 것’ 

초기 작품들이 널리 알려진 탓일까.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발표된 영랑의 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다. 윤동주와 이육사, 한용운으로 대표되는 저항시인의 반열에 그의 이름이 좀체 거론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시를 주로 썼던 영랑에게도 ‘독’을 품은 시어로 일제의 탄압에 맞선 시기가 있었다. <독을 차고>, <거문고>, <두견> 등 비장하고 결연한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했던 1938년부터 1940년까지다. 한국어 사용이 전면 금지됐던 1941년부터 광복 전까지는 아예 붓을 놓았다.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한 시대였던 만큼 애국을 노래했던 시인들마저 속속 변절의 길로 돌아섰다. 우리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인 시대에 그는 일어로 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일을 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문인들 중 한 명으로 남았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중략)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 <거문고>중)

시대를 잘못 만나 영영 제 곡조를 잃어버린 ‘거문고’를 상서롭게 태어났지만 제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동물 ‘기린’에 빗댄 이 시는 영랑의 대표적인 저항시다. 이리떼와 잔나비떼가 설치는 황야는 일제와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 선율을 잊은 악기의 운명은 곧 나라를 잃은 민족 전체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한창이던 시절, 문인의 이름과 언어를 빼앗기는 것은 곧 손발이 잘리는 것과 마찬가지. <거문고> 후 10개월 만에 <독을 차고>에서는 죽음까지 불사한 저항의 정신이 더욱 도드라진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중)

영랑이 이 시를 쓸 무렵, 일본은 민족시인들이 순수시를 쓰는 것조차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책문학’을 내세우며 천황을 찬양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도록 강요한 것. 우리말의 감미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고심했던 영랑이 ‘짐승에게 뜯기더라도 가슴에 독을 차겠다’ 고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처음 시를 쓸 때의 결의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했던 문집 <시문학>의 후기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시키는 길이다’

그에게 언어는 필요에 의해 주고받는 말,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던 셈이다. 영랑의 문학은 말로 빚어낸 민족의 정체성이었다. <독을 차고>에서 말하는 ‘독’은 곧 그 정체성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후배 시인 박두진은 그의 ‘독’을 이렇게 평했다. ‘뼈 있는 지성인의 서릿발 같은 지조가 칼날의 섬광으로 위세를 떨쳤네.’

김영랑 시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구가 적힌 시비.
김영랑 시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구가 적힌 시비.

 

 광복을 맞이했지만… 

‘오! 친구야 현실은 무섭고 괴롭도다. 이 세대에 태어난 불쌍한 천재들이 허덕이다 못해 모조리 변통하지 않았더냐. 사람으로 살려면 오로지 떳떳해야 시원하고, 그러려니 현실이 아프고 그래 우리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가는 게지.’ (김영랑 수필 <두견과 종다리>중)

시인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변절’. 결국은 해방되는 그 날까지 우리말과 자존심을 지켜내며 떳떳하게 광복을 맞이했지만, 되찾은 빛의 찬란함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서울에서 포탄 파편을 맞아 숨을 거둔다.

올해는 그간 숱한 사람들의 노력에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영랑이 마침내 ‘건국포장’을 받은 해이다. 명실상부 한 ‘독립투사’가 되는 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이다. 암울한 시대를 외면한 채 서정에만 취한 백면서생으로 그를 오해했던 지난 세월이 아쉽지만, 늦게라도 시인의 온전한 면모를 찾으니 다행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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