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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구의 동시동심] 가지치기하던 날

입력
2017.02.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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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젊었을 때 집 뒤 야산을 개간하고 사과나무를 심으셨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전지가위를 들고 과수밭으로 나가 가지치기를 하셨다. 전지가위의 날 부분은 반달 모양으로 둥글었는데, 어린 나는 호기심으로 전지가위를 잡고 나뭇가지를 잘라 보았지만 가느다란 것도 힘에 부쳤다. 쌀쌀한 공기에 봄기운이 멀리에서 느껴지고, 사과나무의 시커먼 겨울눈은 조금씩 물을 끌어올려 부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난해에 웃자란 가지와 꽃눈이 있는 자리를 잘 살펴서 가지치기를 해 줘야 그 해 사과농사가 순탄하였다. 우리 집 한 해 농사의 시작이 가지치기로부터 시작되던 때였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니 며칠 전 전지를 했는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몽둥이처럼 뭉툭한 모습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사다리차가 와서 전기톱으로 위잉위잉 꼭대기 가지까지 사정없이 쳐냈을 것이다. 그렇게 잘려도 보도블록 밑으로 굳게 뿌리를 내리고 매연과 분진, 심야의 불빛까지 견디며 다시 쑥쑥 자라는 플라타너스의 생명력이 나는 감탄스러웠다.

김종헌 시인의 ‘가지치기하던 날’은 가로수나 공원 나무의 전지 전정 작업을 보고 쓴 작품이다. ‘새봄맞이’ 작업이라고 현수막이 안내하고 있지만 아직 날씨는 쌀쌀하고, 다가오는 전기톱 소리에 펄럭이는 현수막은 “눈바람보다 차갑기”만 하다. 전지용 전기톱날을 피할 수 없는 나무의 운명과 공포를 시인은 자신의 아픔으로 생생히 느꼈던 듯하다. 그래서 전기톱 소리는 “쫓아오는” 것이라 하고, 잘려 나갈지 모르는 가지의 꽃망울들은 “파랗게 질렸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꽃망울들은 곧 붉은 웃음을 터뜨리리라.

읽으면서 알아차린 독자도 있겠지만 ‘가지치기하던 날’은 시조 형식으로 쓴 동시 즉 동시조다. 시조 창작에는 전통 장르로서의 옛 맛을 잘 되살려 쓰고자 하는 방향도 있고, 과감하게 현대적 변용을 추구하는 방향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형식 안에서 시심이 자유롭게 놀 수 있으면 된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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