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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안전비용 청구서

입력
2017.09.0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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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생리대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난 뒤로 일회용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다른 대체용품을 찾았는데 이게 웬걸. 해외직구를 제외한 유기농, 면생리대는 모두 품절상태였다. 면생리대는 지금 주문하면 최소 석 달 후에나 받을 수 있고, 유기농 소재로 만들었다는 해외 일회용 생리대는 동난 지 오래다.

주변에서는 이미 생리대 대란을 한 번 치렀다. 친구는 친환경 생리용품을 구하기 위해 여러 매장을 다닌 후에야 겨우 살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면생리대나 생리컵으로 바꿨다. 어느 지역에 몇 개가 남았다는 정보부터, 밤새 생리대 사이트를 뒤져가며 남은 상품을 찾느라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까지. 어느 모임에서나 생리대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부모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생리대와 기저귀를 같은 회사에서 만들고 판매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치약, 샴푸, 계란, 가습기 살균제, 세재 잊을 만하면 터지는 유해 생필품 뉴스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지난해 치약에서 유해성분이 검출되었을 때, 공개된 리스트를 보고 모든 치약을 버렸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쓸 수 있는 생리대가 없었다. 항목만 바뀔 뿐이다. 유해성 검출 생필품은 그 가지 수가 늘어나는 것 외에 달라진 게 없다.

국내 화학제품에 대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자, 해외 사이트에서 생필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어느 해외배송 사이트는 8월 한 달 동안 생필품 해외직구가 지난달 대비 약 190%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 중에 여성생리용품은 약 1,200% 증가했다. 국내에서 불안전한 제품을 구매하느니 조금 더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해외에서 안전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불안심리가 커질수록 개인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살아야 한다. 유기농 소재, 면생리대를 구매하기 위해서라도 몇 만 원을 더 지불하고, 해외 배송비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우리는 해외직구 사이트를 드나들며 살 수 있을까? 언제까지 유해물질에 대한 공포심을 안고 살아야 할까? 언제까지, 안전을 대가로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 동안 여성으로 살면서 비싼 생리대 값을 지불하는 것도 버거웠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한 명의 여성이 평생 사용하는 생리대는 약 1만 1,400개라고 한다. 생리대 값으로만 500~600만원을 부담하는 꼴이다. 그런데 유해물질이 검출되고 난 후 더 비싼 생리대에 값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 이미 세금으로 안전비용을 내고 있었는데, 내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더 위험에 노출되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안전비용을 추가로 지불하며 살라는 것 같다.

내가 지불해야 할 안전비용은 그 동안 안전한 것처럼 속여 판 기업과 자의적으로 유해성을 판단하고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 정부의 안일함 때문이 아닌가?

더구나 안전문제는 단순히 A제품을 B제품으로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제품에서 유해요소가 발생한 이유는 그 제품을 허가하고, 생산하고, 유통하는 전 과정에 걸친 시스템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업과 국가가 그 사안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할 의무를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생리대 사태의 경우, 시스템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안전비용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유해성을 여성에게 직접 밝혀내라고 한다. 위험은 사회적으로 발생한 것인데, 안전비용은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 이제는 여성이 국가와 기업에게 안전비용을 청구할 때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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