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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진보 정부’라는 페이크 뉴스

입력
2017.06.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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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진보’ 정부일까.

대선 전후 쏟아져 나온 정치 관련 책 중에 ‘그래요 문재인’(은행나무)을 보자. 제목에서 보듯, 각계 전문가 20여명이 문재인 후보 지지 이유를 밝힌 책이다. 이 가운데 안경환 서울법대 명예교수가 쓴 글 ‘벗과 논하는 지도자의 길’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안 명예교수가 글에서 ‘벗’으로 불러낸 이는, 동갑내기 고(故) 박세일(1948~2017) 서울법대 교수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 고인은 ‘뉴라이트의 대부’이고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숨은 신’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안 명예교수는 ‘문재인에 대한 용비어천가’ 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던 벗, 그 벗이 남긴 아이러니에 집중한다.

안 명예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박세일이 2002년에 낸 ‘대통령의 성공조건’은 이듬해 출범한 참여정부의 중요한 참고서가 됐다.” 단적으로 로스쿨은 고인이 제안하고 참여정부가 시행했다. 그렇다면 이명박ㆍ박근혜정부는? “박세일의 이상에 힘입어 집권에 성공한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그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를 국정이념으로 채택하지 않았고, 정책에도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박세일식 합리적 보수’를 이어받은 이는 참여정부였으며,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배신자였다는 얘기다. 안 명예교수의 글에는, 이를 미처 몰랐거나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벗에 대한 짙은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이 평가에 따르자면 참여정부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 또한 ‘새로운 보수’다.

그래서 지지 또는 비판하라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이긴 매한가지”라고 비판하건, “우리 상황에서 그 정도만 해도 된다”고 감싸주건, “그래 봤자 종북 좌파”라고 또 다른 차원에서 비판하건, 그건 제 각각의 세계관에 따라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안 명예교수 주장의 포인트는 ‘가짜 진보’, ‘그나마 진보’, ‘빨갱이 진보’라는 세 종류 비판이 범주의 오류라는 데 있다.

우리는 왜 보수의 일부를 굳이 진보라고 불러야 할까. 그건 우리 보수가 속 좁아서다. 보수는 원래 속이 좁을까. 영국 보수당을 연구해온 박지향(서울대)ㆍ고세훈(고려대)은 정반대의 얘기를 들려준다. 영국 보수당의 원칙은 ‘일국 보수주의’(One-Nation Toryism)다. 쉽게 풀면 ‘확장지향적인 권력욕’이다.

혈통과 재산으로 갈기갈기 찢긴 영국이 아니라 하나된 영국을 만들기 위해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들, 심지어는 좌경화된 인물과 정책까지 다 끌어안겠다는 얘기다.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 총리는 이 원칙으로 보수당 장기집권을 성사시켰다. 2차 세계대전 뒤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의 원동력으로 꼽히는 ‘포괄정당’ 혹은 ‘국민정당’ 전략도 여기서 나왔다는 평이다. 물론 영국 보수당 내에서는 “정치적 협잡”이라는 비판이, 일본 자민당 내에서는 “우리 당 정책인지 공산당 정책인지 모르겠다”와 같은 불만이 속출했지만.

이번 대선 때 ‘디지털 시대라 페이크 뉴스가 극성’이라며 언론들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힘쓴 것이 ‘팩트 체킹’이다. 주요 사실관계를 또박또박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보수 vs 진보’라는 구도 자체, ‘문재인은 진보’라는 규정 그 자체에 대한 팩트 체킹은, 과문해서인지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진짜 보수’라 주장하는 이들이 저쪽에 있으니 그들과의 거리를 따져 ‘문재인은 진보’라 손쉽게 규정짓고만 게 아닐까.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말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나 빼고 다 좌파’라는, 속 좁아터진 보수의 범위를 한껏 넓혔으면 좋겠다. 문재인 정부를 기어코 진보 정부라 불러야만 하는 이들은, 사실 그걸 가장 두려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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