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익
의학전문기자

등록 : 2018.07.09 23:00

노년기 죽음에 대한 강박감, 되레 진지하게 생각하면 불안감 사라져

[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등록 : 2018.07.09 23:00

⑥남범우 건국대 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84세 남성이 부인과 함께 진료실을 찾았다. 8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고 꼿꼿한 골격이었다.건강하게 태어났고 관리가 잘된 몸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체구가 작고 여린 부인에게 의지해 들어올 수밖에 없을 만큼 쇠약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점을 잃어 공허함만 가득한 퀭한 눈과 떠듬떠듬 본인의 고통을 말하는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너무 불안해 죽을 지경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 절대로 멈추지 않는 그 생각 때문에 너무나 괴롭다’는 절망을 깊은 한숨과 함께 전해주었다. 84세, ‘이제 살만큼 다 살았다’고 스스로도 얘기하는, 인생 후반을 지난 노년의 이 환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증상이 시작된 것은 6개월 전 10살 아래 후배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내가 이 친구 보다 10년이나 오래 살았네. 이렇게 오래 살아도 되나. 나도 곧 죽겠지.’ 그 이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젠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정도로 죽음이라는 단어만 선명하게 강박적으로 머리에 떠올라 고문을 가하듯 맴돈다고 했다. 특히 괴로운 것은 어렵게 잠이 들었다가 한두 시간 후 깨어나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강박적인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다 날이 새는 것을 보는 것이라 했다.

환자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독립해 자신의 사업을 했다. 몇 번의 작은 부침은 있었지만 별 무리 없이 사업을 키워 자식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평소의 꿈대로 전원생활을 하며 보내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 왔다. 결혼 생활도 평탄한 편이었다.

부인 입장에서는 완고한 환자의 성격이 불만이긴 해도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오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자녀도 잘 커서 전혀 걱정할 일이 없었다. 아주 고결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나 회한이나 후회가 될 만한 과거는 전혀 없다고 했다.

과거를 중시하는 정신분석의 이론대로 성장과정의 콤플렉스, 갈등, 과도한 죄책감 등을 탐색해 봤지만 별다른 해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 환자에게는 지나온 과거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즉 죽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심층심리학자인 칼 융은 인생을 기차에 비유하며 기차가 한 번도 멈출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은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출 때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고 했다. 기차 안의 세계에 매몰돼 기차 밖, 즉 우리 내면의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외면의 물질적인 삶만을 추구하면 삶이라는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는 노년기에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했다.

해결책은 기차가 느려지고 언젠가 멈출 수 있다고 인지하며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 환자의 경우 오히려 ‘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안 되는가?’, ‘이제라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노년 인구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다. 한국 사회의 노년층은 전쟁의 비극,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고 살아남은 세대다. 한국 사회에서 노후 대책은 노후 ‘자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생존과 성공이라는 신화를 좇아 내면의 삶을 도외시한 채 평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이제 인생을 정리하는 노년기마저도 물질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앞의 사례에서도 보았지만 물질적 풍요와 안정이 절대로 노년의 정신적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노년의 육체적 건강 역시 노후 대책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정신적 건강이나 삶의 태도에 대한 균형을 잃은 상태의 육체적 건강은 앞의 사례처럼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잘 꾸며진 넓은 방에 덩그러니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며 죽음에 대해 강박적으로 생각하며 일분 일초를 센다는 상상해보면 더 이상 노후 대책을 ‘자금’이나 ‘육체적 건강’에만 국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한국 사회의 노년은 더 이상 죽음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노력해 왔듯이 죽음에 대해서도 성실한 준비와 공부가 필요한 때다.

남범우 건국대 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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