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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부유층 전유물’ 인식 깬 프라다의 패션 혁명

입력
2018.01.06 11: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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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CEO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 부인 미우치아 프라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왼쪽) 프라다 CEO와 부인인 미우치아 프라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왼쪽) 프라다 CEO와 부인인 미우치아 프라다.

“이탈리아의 장인정신과 디자인 전문성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이탈리아 패션산업의 기본 정신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글로벌 패션브랜드 프라다(PRADA)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16년 6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패션산업의 미래를 위한 기술’이라는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발렌티노, OTB그룹 등 이탈리아 패션업계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여 패션 업계가 마주한 도전과 위기, 패션업계 지속 가능성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베르텔리는 “이탈리아 패션의 가장 큰 문제는 기업가 정신의 부재”라며 “오늘날 이탈리아 패션업계들이 이탈리아 패션의 정수 혹은 강점과 어울리지 않는 비즈니스 모델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라다는 올해로 설립된 지 104년이 됐다. 미국과 프랑스 브랜드가 장악한 글로벌 패션 시장에서 프라다는 여전히 소비자들을 마음을 흔드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100년의 세월 프라다의 역사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프라다의 디자이너인 미우치아 프라다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베르텔리의 지칠 줄 모르는 사업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명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트렌드를 주도해오면서 소비자들과의 접점을 넓혀왔던 프라다의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베르텔리는 “이탈리아 패션 시장과 비교했을 때 미국과 프랑스는 제조 부문에서 훨씬 높은 비교 우위를 갖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메이드 인 이탈리아’는 미래 세대를 위한 중요한 받침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일론 소재로 만든 프라다 가방.
나일론 소재로 만든 프라다 가방.

프라다의 탄생

프라다는 1913년 여행가였던 마리오 프라다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최고급 가죽 전문매장 ‘프라텔리 프라다’를 열면서 시작됐다. 주요 제품은 여행용 가방과 가죽 액세서리, 화장품 케이스 등이었다. 마리오 프라다가 제품생산에서 가장 역점을 둔 건 사피아노 가죽이었다. 이탈리아어로 ‘철망’을 뜻하는 사피아노는 소가죽의 부드러운 부분에 빗살이나 철망 무늬를 넣어 광택을 넣어 만든 것이다. 특히 여행하면서 접했던 모조 다이아몬드나 거북 껍데기 등과 같은 독특한 소재를 패션 상품에 응용했다. 디자인에 가미된 이국적인 고급스러움과 함께 내구성과 변색방지에도 탁월해 유럽 왕가와 상류층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프라다는 1919년 왕실의 가죽 및 의류 공식 납품업체로 지정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현재 프라다 로고에 왕실의 문장과 매듭이 포함된 이유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경기의 침체로 프라다는 직격탄을 맞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프라다의 인기비결이었던 독특한 소재들을 구하기 어려운 데다 경기 침체로 패션제품에 대한 소비도 급감했다”며 “마리오 프라다가 세상을 떠난 후 2세들이 운영에 나섰지만 프라다의 명성을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설명했다.

프라다의 역사는 1977년 마리오 프라다의 외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미우치아는 밀라노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공산당원, 연극배우 등으로 활동하는 등 패션을 전공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위에 나갈 때조차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 정장을 도입한 프랑스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의 옷을 입고 나갈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왕실을 위한 가죽가방을 만들어온 외할아버지의 프라다를 물려받은 미우치아는 패션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했다. “명품은 특별한 계급을 위한 게 아닌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패션은 품위 있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어야 한다.” 미우치아는 가죽 소재를 거부하고 대신 방수 천의 일종인 ‘포코노’(Pocono) 나일론을 선택했다. 포코노 나일론은 외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가 자신이 만들던 고급 가죽가방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두던 천이었다.

프라다 의류 브랜드 ‘미우 미우’ 로고.
프라다 의류 브랜드 ‘미우 미우’ 로고.

패션 트렌드 주도한 프라다

미우치아가 1979년에 포코노 나일론 소재로 만든 일명 ‘나일론 백’은 뛰어난 디자인과 실용성으로 대중들의 소문을 타면서 프라다를 명품의 반열로 올려놓은 발판이 된다. 당시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가죽 제품 소매업을 하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의 만남은 현재 전 세계 유명 백화점에 매장을 둔 프라다로 탈바꿈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베르텔리는 자신의 공장 생산라인을 통합, 미우치아 프라다와 프라다 브랜드 가죽제품 컬렉션에 대한 독점 계약을 맺음으로써 프라다에 글로벌 유통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후 프라다는 베르텔리가 경영을 맡고, 미우치아 프라다가 디자인을 전담하는 2인 체제가 갖춰졌다. 이 둘은 1997년 결혼하며 현재까지도 경영 일선에서 프라다의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포코노 소재 나일론 백의 인기는 나일론 코트와 구두, 스커트 등으로 확대됐다. 프라다는 이에 핸드백과 여행용 가방, 액세서리 등 기존 제품라인에서 벗어나 의류와 제화 라인까지 추가하며 사업 영역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1987년엔 새로운 기성복 컬렉션을 출시하면서 길게 늘어뜨린 허리선과 가는 벨트, 원색이 강조된 깔끔한 원단 등을 선보였는데 프라다 의류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프라다는 브랜드 인지도가 상승하자 1993년엔 10, 20대 여성들을 겨냥한 의류 브랜드 ‘미우 미우’(MIU MIU)를 출시했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애칭에서 나온 이름이다. 1995년엔 젊은 남성을 위한 속옷과 스포츠 의류를 차례로 내놓았다.

특히 미우치아는 1998년 프라다 스포츠 패션쇼에서 최초로 정장을 입은 남성 모델에게 활동성을 부여하는 운동화를 신게 하는 패션 스타일을 연출하면서 또 한번 혁신적인 패션 트렌드를 이끌었다. 이때 선보인 운동화가 일본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프라다의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프라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신상품을 가장 먼저 출시하고 있는 이유다. NYT는 “2003년에 출간된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이를 2006년에 영화로 만든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프라다는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며 “프라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혁신적인 패션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특별한 날이 아닌 일상에서 편하고 세련되게 입을 수 있는 멋을 추구하면서 전 세계 대중들에게 명품으로 사랑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2003년 일본 도쿄에 개장한 프라다 에피센터.
2003년 일본 도쿄에 개장한 프라다 에피센터.

프라다의 숨은 성공전략, ‘예술과 문화’

프라다의 성공비결은 혁신적인 경영과 더불어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에 있다. 기업의 주요 아이템인 패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건축과 영화, 그림 등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가 브랜드의 핵심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프라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건축물을 세워 이슈를 만들고 이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진원지’라는 뜻을 지닌 ‘에픽센터 프로젝트’다. 프라다 매장이 그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고 혁신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2000년 건축계의 노벨상에 해당하는 ‘프리쳐 상’ 수상자인 스타 건축가 램 쿨하스와 자크 헤르조그, 피에르 드뫼롱 등을 영입했다. 2003년에 일본 도쿄에 개장한 에픽센터는 도쿄 도시 풍경과 어울리도록 수천 개의 유리 패널로 채워진 다이아몬드 모양의 격자판으로 구성됐고,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된 에픽센터는 층계 밑 거울로 된 바닥에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대리석을 깔고 전시실은 밀라노의 프라다 첫 매장을 참고해 제작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프라다의 매장은 개장될 때마다 프라다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는다”며 “프라다 매장은 패션 창조의 실험실과 같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현재 프라다는 현대 예술계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후원자이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파트리지오 베르텔리는 1993년 밀라노에 ‘프라다 재단’을 설립, 이를 중심으로 국제적 규모의 전시 및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거대한 거미 조각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나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 설치된 미술작품 ‘번개 치는 들판’의 월터 드마리아 같은 거장 예술가들의 발굴에 프라다의 공이 컸다는 평가다. 프라다는 2015년 5월 9일 밀라노에 프라다 재단 미술관을 개장하면서 건축과 예술을 결합한 프라다의 문화예술 마케팅의 정점을 찍었다. WP는 “프라다가 현대 예술을 적극 끌어들이는 이유는 현대 예술의 전위성이 프라다 브랜드의 특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며 “방수 천인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어 패션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프라다의 정체성이 배어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온라인 시대 맞는 프라다의 도전

프라다는 현재 위기를 맞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프라다의 2016년 상반기(2~7월) 매출은 전년동기대비 5.7% 감소한 14억7,000만유로, 순이익은 18.4% 감소한 1억1,570만유로를 기록했다. 2011년 이후 가장 저조한 실적이다. 가장 큰 원인은 급성장하는 온라인 시장을 외면하고 오프라인 매장만 고집하면서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매킨지는 “향후 10년 동안 명품의 온라인 매출이 매년 18% 이상 증가하고 명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온라인 채널을 이용하는 비중도 30%대까지 증가할 전망”이라며 “하지만 프라다는 오프라인 매장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픽센터를 중심으로 한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명품과 혁신 이미지를 쌓아왔던 프라다로서는 온라인 매출로의 변화는 일반 다른 기업들과 달리 패션 브랜드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어 쉽지 않다. 명품 패션업체들은 지금껏 TV 광고도 기피할 정도로 브랜드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철학과 의미를 담기엔 15초라는 시간이 너무도 짧지만, 컵라면 광고나 드라마 등이 명품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의 변화는 프라다의 브랜드를 향후 어떻게 정립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연결돼있다. WSJ는 “명품 패션브래드인 루이뷔통은 자사 온라인몰을 통해 전년동기 대비 24% 증가한 24억9,000만 달러의 순이익을 냈다”면서 “프라다도 어떻게든 온라인에서 활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 등 아시아 시장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프라다 총 매출의 50% 이상이 아시아 시장에서 비롯되는데, 해당 시장에서의 매출 증가율이 지난해 상반기에 두 자릿수에서 4%로 급감했다.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CEO는 “세계 613개 매장 중 13개를 폐점하고 76개 매장을 리모델링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며 “디지털 마케팅에 투자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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