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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차 발칸전쟁 쿠마노보(Kumanovo) 전투(10월 23일)

입력
2017.10.2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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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북부 쿠마노보 시 광장의 인민해방 기념탑. 1차 발칸전쟁 쿠마노보 전투 승리로 오스만제국 지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탑이다.
마케도니아 북부 쿠마노보 시 광장의 인민해방 기념탑. 1차 발칸전쟁 쿠마노보 전투 승리로 오스만제국 지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탑이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 분쟁사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운명, 특히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쇠락의 역사와 함께 살펴야 한다. 하지만 민족ㆍ인종ㆍ종교의 어지럽고 불안정한 단층이 격렬하게 요동친 것은 1912년 10월의 1차 발칸전쟁부터였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경계로 ‘태양이 솟는 땅’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란 이름으로 불리던 발칸반도는 오스만 제국이 기력을 잃으면서 북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아드리아해 건너 갓 통일한 이탈리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삼각파도에 휩싸여갔다.

19세기에 독립했거나 자치령으로 터를 닦은 반도 남북의 왕국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가 민족주의로 무장한 청년투르크 당의 오스만투르크에 맞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10월 8일이었다. 저들 정교문화권 왕국의 배후에는 당연히 러시아가 있었다. 전쟁은 이듬해 5월 말 오스만제국의 패배로 끝났고, 승전국은 마케도니아와 지중해의 섬 등을 나눠 가졌다.

불과 한 달 뒤의 2차 발칸전쟁은 1차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불가리아를 상대로 세르비아와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벌인 전쟁이었다. 강대해진 불가리아에 위기감을 느낀 루마니아, 상실한 영토의 일부나마 되찾으려던 오스만제국이 세르비아에 가세했다. 승리한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해 발칸반도 슬라브민족주의의 구심체로 급부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경합했다. 그 결과가 한 해 뒤의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쿠마노보 전투는 1차 발칸전쟁 초기인 10월 23일 마케도니아 북부 도시 쿠마노보에서 세르비아와 오스만제국이 치른 이틀 간의 전투다. 오스만제국 군에 세르비아군이 대승해 제국 군대의 발칸 보급로를 차단, 1차전쟁의 승기를 마련했다. 그 전투에서 세르비아도 약 5,000명의 사상자(전사 687명)를 냈다. 2차전쟁의 빌미가 된 세르비아의 영토 분배 불만의 근거 중 하나가 저 전투에 대한 온당한 평가였다.

1차대전 추축국의 패배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됐다. 세르비아는 신생국 다수를 흡수하며 더욱 막강해졌고, 2차대전 후 6개 공화국(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과 2개 자치주(코소보, 보이보디나)를 아우른 연방 인민공화국이 됐다. 91년 연방 해체 이후 보스니아 내전(92~95년)과 코소보 전쟁(99년)이 이어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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