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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성희롱 건배사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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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성희롱 건배사 하실 건가요?

입력
2016.12.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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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동시에 청정하게 유쾌한 건배사를 연구해야 할 때다. 일러스트 신동준 기자
송년회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동시에 청정하게 유쾌한 건배사를 연구해야 할 때다. 일러스트 신동준 기자

건배사의 계절이 돌아왔다. 왜 한국인들은 술자리에만 모이면 건배사를 외치는가, 회의가 일지만 소용없다. 잇단 송년모임, 당신은 어김없이 호명되고, 좌중은 벌써 주목한다. ‘우행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를 외치자니 식상하고, ‘지화자!’(지금부터 화합하,자)로 해보자니 운율도 안 맞는다. 센스 없다는 평가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를 옥죈다. 기필코 웃겨야 하건만.

그렇다고 ‘거시기!’를 떠올렸다면, 일단 멈추자. ‘거절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기쁘게’를 뜻하는 ‘거시기’는 아슬아슬한 19금 유머이기는커녕 다층적으로 불쾌한 ‘꼰대 인증’일 뿐이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술자리가 가능한 세상이 이미 아니다. 건배사 어플을 뒤져 색다르게 준비한 ‘남존여비 여필종부’(남자의 존재의미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며, 여자는 필히 종부세 내는 남자와 결혼해라)도 마찬가지. 반전과 의미전복을 의도했겠지만, 속뜻이나 겉뜻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한 공공기관 남성 간부는 2010년 ‘오바마’라는 경천동지할 건배사를 외쳤다가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 사임했다.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하세요.’ 말 한 마디로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곳이 연말 송년회다. 현재는 무려 2016년. 건배사의 업데이트가 시급하다.

'혼자만 웃기면 무슨 재민겨'. 송년회는 혼자 웃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혼자만 웃기면 무슨 재민겨'. 송년회는 혼자 웃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초급자는 ‘클린 조크’부터

농담에도 등급이 있다. 동음이의어나 이음동의어를 이용한 단순 말장난부터 성인용 19금 농담까지, 상대 공격형부터 자기 비하형까지 종횡으로 다채롭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초급부터 시작해야 하듯, 농담도 자기 레벨에 맞게 구사해야 실패하지 않는다.

유아들의 언어 습득기부터 시작되는 말놀이는 인간의 농담본능을 보여주는 사례로, 요사이는 아재개그로 명명되고 있다. 썰렁하고 유치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고 있지만, 정밀 타격에 성공하면 핵폭탄급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 “김밥이 죽으면 가는 곳은 김밥천국”과 경북 상주에서 열린 사드 반대 집회에서 “나는 종북이 아니라 경북”이라고 외친 방송인 김제동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가 미적 전통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말놀이는 특히 애호되는데, 너무 애호되다 보니 반복과 남발로 인해 식상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아재개그에는 분명 매력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중학교는 로딩중”이라며 키득거리는 ‘아재’에게는 청정한 매력이 있다. 순수한 동심을 잃지 않는 이 청순한 매력은 ‘오바마’와 비교해보면 또렷해진다. 아재개그 중 가장 야한 것이 “야채 중 가장 야한 야채는 버섯” 정도로 아재개그는 ‘클린 조크’다. 아재개그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 이 어수선한 시국, ‘오늘 우리, 차라리 지루하자’는 각오로 담백하게 유머를 구사하는 게 오히려 참신할 수도 있다. ‘오바마’를 ‘오직 바라건대 마음을 울리는 대통령으로!’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하나도 안 웃겨요." 어설픈 '19금 농담'은 여성들을 분노케 할 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하나도 안 웃겨요." 어설픈 '19금 농담'은 여성들을 분노케 할 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꼭 19금 농담을 해야겠다면

이 소소한 매력에 안분지족하지 못하고 대담한 시도를 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19금 농담의 유혹에 빠진다. 성공했을 때 돌아오는 매력의 환급분이 가장 큰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금 농담은 농담의 체계에서 가장 고난도에 속하는 레벨이다. 더군다나 성적 농담이 이뤄지는 섹슈얼리티의 의미망 자체가 여성을 대상화, 타자화하는 미소지니의 세계관에 기반해 있다. 말이 19금이지 사실상 여금(女禁) 농담이 대부분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녀직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사장님이 여성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농담은 철저히 권력의 위계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한 성이 다른 한 성을 성적으로 조롱하고 타자화하는 것은 그 주체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러려고 송년회에 모였나’ 자괴감만 줄 뿐이다.

그럼 도덕군자의 세계에 살란 말이냐고 반발할 수 있다. 성적 농담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요사이 ‘셀프 디스’라는 말로 통용되는 자기비하 유머를 구사하는 것이다. 5일 영화 시사회에서 성희롱 발언 사과를 한 배우 김윤석과 세계 최고의 ‘유머 강대국’ 영국에서도 가장 유머감각이 탁월했던 정치인으로 꼽히는 윈스턴 처칠을 비교해보자. 김윤석은 앞서 열린 무비토크 행사에서 흥행 공약으로 “(여자 배우들의 무릎을 덮는)담요를 내리는 게 어떠냐”고 말해 성희롱 논란을 빚었다. 반면 팔순을 넘긴 처칠은 ‘남대문이 열렸다’는 지적에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요”라고 답했다. 나를 주어로 얘기하라는 ‘I-메시지’의 비법은 농담의 세계에서도 유효하다. 무릎담요를 굳이 내리고 싶으면 자기 것을 내리면 된다. 성적 농담이 숱한 논란만 남기고 실패로 끝나고 마는 데는 농담의 권력적 속성에 대한 이해부족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비하 농담을 잘 구사하는 남성이 가장 섹시하다는 여성들의 평가를 받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자기비하 농담을 잘 구사하는 남성이 가장 섹시하다는 여성들의 평가를 받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자기비하 농담이 가장 섹시

전문가들이 권하는 안전하면서도 고차원적인 유머는 바로 자기비하적 유머다. 특히 조직 내 상급자나 사회적 강자에게 유효한 유머코드다. 무시무시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자기비하 유머를 구사하면 상대는 이내 무장해제되며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겸손하고 접근 가능하며 인간적이라는 평판까지 얻을 수 있다. 외모비하를 많이 당했던 링컨 대통령은 유머감각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다. “제가 얼굴이 두 개라면 하필 이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겠습니까?”라고 응수한 것이다.

영국식 유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기비하는 특히 남성에게 절대적 효력을 발휘한다. ‘진화심리학저널’ 2008년도 7월호에 실린 ‘셀프디스: 자기 비하적 유머의 성적 매력도’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비하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가장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여성들에게 2년간 남성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게 한 후 그들의 성적 매력도를 측정하도록 했더니, 자기 비하 유머를 구사한 남성이 가장 매력적으로 평가됐다는 것이다. 대표 필자인 길 그린그로스 미국 뉴멕시코대 강사는 “많은 연구가 남성의 유머 감각이 여성에게 성적 매력으로 어필한다는 것을 밝혔지만, 이번 연구로 유머 중에서도 자기비하 유머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달랐다. 자기비하 유머를 남성 리더가 구사하면 하급자들은 그를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리더는 약점으로 평가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히 이뤄진 게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여성은 전통적으로 리더로서 인식되지 않으며, 무의식의 차원에서 복종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때문에 여성의 자기비하 농담은 기껏해야 재미없거나 최악의 경우 미래의 리더십에 걸맞지 않다는 사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여성의 자기비하 유머는 대체로 실패하며, 여성은 압도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 받을 경우에만 자기비하 유머를 시작할 수 있다고 논문은 조언했다.

사람들 앞에서 기지와 재치를 발휘해야 할 땐 늘 농담의 5원칙을 상기하자. 게티이미지뱅크
사람들 앞에서 기지와 재치를 발휘해야 할 땐 늘 농담의 5원칙을 상기하자. 게티이미지뱅크

안전하고 유쾌한 농담 5계명

안전하고 유쾌한 농담의 제1 계명은 위험부담이 낮은 클린 조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레벨을 올려보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살신성인의 유머를 구사하라’의 2계명으로 넘어간다. 자신을 높이고 상대방을 뭉개는 방식의 유머를 통해 자기권력을 보존하거나 과시하려는 욕망에 많은 사람들이 진저리를 쳐온 지 오래다. 한국 사회에 영국식 자기비하 유머가 승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낮추면 만만하게 보고 알아주지 않는 경향이 실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겸손하게 자기비하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겸손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인간의 인간적인 면모 중 하나다. ‘자뻑’도 종종 사랑스러울 수 있다. 다만 공격적 유머의 쾌감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공정성이라는 기준을 관철하려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우스꽝스러움을 지적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를 할 때 특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사악한 권력자나 부당한 기업가를 대상으로 비하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동원해선 안 된다. ‘약자에 대한 조롱은 농담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농담의 세 번째 계명이다.

농담을 상향식과 하향식으로 나눈다면, 조롱과 풍자는 상향식으로만 가능하다. ‘용맹하게 강자를 조준한다’가 원칙이다. 이때 종교나 정치처럼 견해의 다양성이 갈리는 영역은 타격 지점을 정밀하게 조준해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일수록 농담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생기기 쉽다. 농담의 순간, 웃을 수 없는 사람이 혹시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게 농담의 4계명이다.

유머의 기본 원리는 예상을 깨는 의외성이다. 유행어의 반복이나 달달 외운 유머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참석자들을 향한 배려와 감사의 마음이 느껴진다면 유머 없이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진실된 유머는 머리에서 나온다기보다 마음에서 나온다”고 한 영국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이야말로 잊지 말아야 할 농담의 진리다.

박선영 기자 aur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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