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오, 방학양반! 내가… 개강이라니!!’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에 내걸린 개강맞이 현수막 문구에서 때 아닌 안타까움과 탄식이 묻어난다. 부상으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TV드라마 속 인물의 절망적인 대사까지 빌어 학생들은 눈 앞에 찾아 온 개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강이라니!” 방학에 대한 아쉬움이야 예나 지금이 다를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개강이 결코 와서는 안될 절망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이유가 뭘까. “개강 해 봤자 지난 학기에 했던 고생을 4개월 동안 또 할 게 뻔하잖아요. 방학이나 얼른 또 했으면 좋겠어요”이화여대 4학년 문모씨는 개강을 맞는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엄마, 이번 학기도 미안해…’
또 다른 개강맞이 현수막은 하필 학자금 대출 안내 바로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 더 서글퍼 보인다. 등록금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에 목이 메인다. “개강하면 교재비며 생활비며 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서강대학교 3학년 최모씨는 학업과 아르바이트, 취업준비에 벌써 지쳐간다고 하소연했다. 취업포털 알바몬이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 꼴로 개강과 함께 무기력증이나 수면장애, 우울감 등이 찾아오는 새학기증후군을 겪고 있다. 개강에 대한 기대보다 부담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등록금과 생활비 등 경제적 압박을 가장 큰 부담으로 꼽았고 학점과 스펙 관리가 그 뒤를 이었다.
‘학교가 유일하게 미리 통보한 개강’
성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사 제도의 변경이나 자치권에 대한 학교의 일방적인 결정과 통보 행태를 비꼬는 현수막도 눈에 띈다. 현수막을 만든 이 학교 4학년 김모씨는 “학교에 반발한다기 보다 교내의 총체적인 상황을 풍자하려는 의도”라고 밝혔다.
유명 영화 제목을 본 뜬‘님아 그 개. 강을 건너지 마오’처럼 현수막 속 패러디는 한 번 쓱 웃고 지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개강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 유부남 연예인이 아내 아닌 다른 여성에게 보냈다는 야릇한 카톡 메시지를 본 떠 만든 ‘영어대 머리 속엔 개강, 과제, 연애, 성공적’이라는 현수막에선 학업과 연애의 동시 성공을 바라는 학생들의 속 마음도 읽을 수 있다. “걱정거리가 없진 않지만 개강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에 설레요. 왠지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요”이화여대 4학년 김모씨에게 개강은 아직 기회이자 희망이다.
‘괜.찮.아.요? 많.이.놀.랬.죠? 어.서.역.동.으.로.들.어.와.요’ 신입회원 모집에 나선 동아리의 홍보 현수막에는 유행어가 된 TV 시리즈 주인공의 대사에‘짤방’까지 곁들여져 있다. ‘오빠가 리드하면 넌 리듬에 몸을 맡겨’ 라는 댄스 동아리 현수막의 ‘남녀노소 누구든 환영’한다는 문구를 보면 ‘내 속의 열정’이 저절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재치 넘치는 홍보물에 이끌려 여러 동아리에 관심은 가지만 정작 신입생이 몰리는 곳은 따로 있다. ‘리크루팅, 차이를 만드는 전략적 선택’처럼 경영 마케팅, 비즈니스 전략 등 스펙이나 취업, 진로 관련 키워드에 충실한 학회들로 입회 자체도 쉽지 않다.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 신입회원을 선발하는데 경쟁률은 4:1에서 높게는 8:1 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학회들이 경쟁적으로 내건 대형 현수막에 비해 아이디어 회의까지 거쳐 만든 동아리 홍보물이 유난히 초라해 보이는 대학가의 개강 풍경이 씁쓸하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그래픽=강준구기자 widms4619@hk.co.kr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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