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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응답하라, 이 비명에

입력
2017.11.24 11:3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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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청원할 일이 많다. 지난 10월 말에는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관련 청원에 동참했다. 당시 마감일 직전에만 10만 명 이상이 청원에 참여하면서 총 23만여 명이 뜻을 모았고, 현재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 참여한 청원은 ‘경찰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 성폭력 인식 재교육과 부적절한 대응의 처벌 강화’에 대한 청원이다. 지난 11월 초,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 한 가해자가 침입한 상황에서 경찰이 무책임하게 대응하여 피해자를 더한 위기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해자의 상황을 대변하고 무성의하게 조사에 임한 경찰을 규탄하는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시태그가 SNS를 통해 퍼져나갔고, 이에 동참하여 경찰과 관련한 부정적 경험을 털어놓은 게시글은 10만 건이 넘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후속 기사를 지켜보며 사실 이 두 청원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폭력으로 인해 임신한 피해자가 법적 절차에 따라 중절 시술을 받으려는데 병원과 경찰 양측에서 모두 피해자에게 피해자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가 없다. 일상에서 폭력과 위협을 당했을 때 국가가 나를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수많은 이들이 털어놓은 절망적인 경험들 속의 경찰은 마치 한 사람인 듯 보인다. 나도 그 경찰을 만나보았다.

3년 전 우리 집 맞은편에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자가 살았다. 남자가 술만 마시면 고성이 오가곤 했는데 심한 날은 무엇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섞여 들리곤 했다. 저러다 큰일이 나겠다 싶은 밤이면, 나는 혹시 가해자가 신고자가 나인 것을 알아챌까 몰래 불도 켜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문을 두드렸고, 남자가 나와 “가족 사이의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말하면 “이웃들에게 피해가 가니 조심하라”는 언질 정도만 주고 떠나갔다. 경찰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똑같은 결과에 나는 매번 절망했다. 나 또한 이럴진대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폭력을 벗어날 통로를 찾은 줄 알았을 피해자들의 절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정폭력은 ‘상관하지 말아야 할 가정의 일’이라는 말 안에서 더욱 커진다. 가정이 사적이고 내밀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즉시 가정 내 약자는 고립되고 극심한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사이라는, 연인이라는 말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등 돌린 사람들과 신고를 받아주지 않거나 안이하게 대처한 경찰로 인해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부장제가 공고히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가정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가정을 파괴한 주범으로 낙인 찍히고, 수없이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소위 ‘꽃뱀’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기를 요구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경험을 털어놓는 것이나 국민청원뿐이라고 생각하면 갈 길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한 사람의 청원 참여 국민이 된다. 이는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다 하는 경찰 개개인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계속되는 폭력에 터져 나온 비명이며, 폭력의 상황에서 ‘알아서 도망치기’라는 선택지를 택하지 않고 나를 보호해 줄 국가와 든든한 경찰의 존재를 믿고 싶은 이들의 바람이다. 그러니 사람이 먼저이고 이 나라의 여성 또한 사람인 걸 알고 계신다면, 청와대와 정치인들은 이 비명에 속히 응답해주시길.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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