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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볼 수 있을까" 남편 넥타이 매만지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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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볼 수 있을까" 남편 넥타이 매만지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입력
2015.10.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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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

"건강하슈, 오래 사슈" 작별인사

진통제 맞으며 "얼굴 한번 더 보자"

北측 가족 태운 버스 떠나려 하자

창문 밖 내민 손 움켜쥐고 오열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행사는 22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진행된 작별상봉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북측 가족들이 탄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남측 가족들이 손을 놓지 못한 채 눈물로 마지막 배웅을 하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행사는 22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진행된 작별상봉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북측 가족들이 탄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남측 가족들이 손을 놓지 못한 채 눈물로 마지막 배웅을 하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건강하슈, 오래사슈.”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북측의 남편 오인세(83) 할아버지의 넥타이를 어루만지던 이순규 할머니(85)의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65년 간 기다려왔던 남편을 살아 생전 또 볼 수 있을까. 이 할머니는 한참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 새끼 손가락에 은가락지를 끼워주며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라”고 작별 선물을 건넸다. 상봉 기간 내내 호탕한 웃음으로 밝은 분위기를 주도하던 오 할아버지는 “지하에서 또 만나…”라는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남북한 이산가족은 22일 작별상봉을 끝으로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이날 작별상봉이 진행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는 서러움에 북받친 가족들의 통곡과 오열이 넘쳐 흘렀다.

딸의 부탁에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줬던 북측 최고령자 리흥종(88) 할아버지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딸 이정숙(68)씨와 누이 동생 이흥옥(80) 할머니는 리 할아버지가 어디라도 갈 새라 양팔을 나란히 붙잡고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이정숙씨는 “내가 또 만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 볼게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드릴 수 있다”고 울부짖었다. 팔순의 동생은 오빠의 손을 꼭 잡고 “오빠, 어떡해… 어떡해…”만 연신 되뇌었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몸을 가누며 상봉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허리 디스크 통증이 심해져 전날 상봉 행사에 불참했던 염진례(83)할머니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북측의 오빠 염진봉(84)씨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남측 최고령자 김남규(96) 옹은 상봉 기간 의지했던 휠체어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여동생 김남동 할머니(83)가 떠나는 길을 배웅하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쓰러지는 어르신들이 속출했다. 허리와 무릎이 안 좋은 북측 가족에게 직접 파스를 붙여주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또 다시 반복될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분노도 터져 나왔다. 북측의 누나 박룡순(82)씨를 업고 테이블을 한 바퀴 돈 박용득(81) 할아버지는 “내 차로 (다시) 북으로 데려다 줄 테니, 오늘은 서울에 같이 가자, 가서 2~3일 자고 가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룡순씨의 북측 아들이 “통일되면 만날 수 있다”고 달랬지만, 박 할아버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내 가족을 우리 집에 못 데려가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브라질로 이민간 동생들에게 영상편지를 남겼던 북측의 남철순(82) 할머니도 “통일 되면 우리 가족 모두 큰 집에 모여 살자. 이런 불행이 세상에 어디 있니”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테이블을 내리치기도 했다.

2시간의 짧은 상봉이 끝나고 북측 안내원들이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다고 테이블을 돌며 알려오자 가족들의 슬픔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남북한 가족들은 저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무조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다짐과 약속을 주고 받았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큰 절을 올리는 가족도 있었다.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먼저 일어서는 북측 가족의 손을 쉽사리 놓지 못해 끌려가다시피 따라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북측 가족이 버스에 모두 탑승할 때까지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소리에 유리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북측 가족을 태운 버스가 떠나려 하자 남측 가족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저마다의 북측 가족을 애타게 찾느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살아 있으라”고 외치며 창문을 두드리거나 버스가 움직일 때까지 창문 밖으로 내민 손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말도 못하고 한참을 창 사이로 손바닥만 마주 대는 가족도 있었다. 누나에게 함께 서울에 가자고 떼를 썼던 박용득 할아버지는 “65년 전에 헤어질 땐 이렇게 길지 몰랐으니까 울지도 않았어. 근데 다시 만나는 데만 65년이 걸렸어. 이제는 그렇게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흐느껴 울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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