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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K교수의 국가론

입력
2016.05.2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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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을 맞아 학생 대표가 가져온 색동 편지 따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카드에는 “선생님 존경합니다”라는 관용구가 적혀 있었다. 혹시 이 선물을 사기 위해 세금 걷듯 반강제로 돈을 걷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그러나 K교수는 선물에 고무된 나머지 그날 따라 정성스럽게 국가론 강의를 준비했다.

“오늘의 주제는 국가입니다. 올슨(Olson)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란 깡패죠. 깡패는 약자의 금품을 갈취하는 게 일이죠. 주변의 약자로부터 더 뺏을 게 없어지면,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죠. 그렇게 유랑하다가 약자와 마주치면 또 뺏죠. 유랑 생활이 피곤해졌을 무렵 국가가 탄생한다고 하네요. 깡패가 정착해서 세금을 걷기 시작하는 거죠. 약자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리면, 피곤하게 또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야 하니까 이제 폭력을 자제하죠. 대신 선거를 치르기도 하고, 국정 교과서를 만들기도 하는 등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어느덧 민주 국가가 된다는군요.

출장 중에 어쩌다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 유랑하는 폭주족을 보게 되면, 이 국가론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죠. 정상적인 국가 따위는 건설하기 귀찮다는 듯, 폭주족들은 그들의 고속도로 안에서 제멋대로 웃고 떠들고 놀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하죠. 마치 작은 하마가 장난감 기차를 사랑하듯이, 폭주족은 자신들이 모는 할리 데이비슨을 매우 사랑한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항적 언론인 하나가 차를 빠르게 운전하더니 그만 뒤에서 사랑하는 할리를 받아 버렸어요! 할리는 화염에 싸여 그만 폭발해버렸죠. 그 폭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폭주족은 너무 슬펐지만 용기를, 아니 성질을 내기로 했답니다. 마치 장난감 기차를 빼앗아간 까마귀에게 칼부림하는 작은 하마처럼, 폭주족은 그 언론인에게 내뱉었답니다. 내 사랑하는 할리를 파괴했으니, 이제부터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걸 파괴하겠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건 뭐지?”

K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언론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학생들의 무반응에 약간 의기소침했지만, K교수는 성질을, 아니 용기를 내어 강의를 이어나갔다. “언론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것은 시(詩).’”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K교수는 혼자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재밌지 않아요? 시를 어떻게 파괴하지? 황당해하는 폭주족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웃기죠, 그렇죠?”

작은 하마 이야기와 영화 ‘앵커맨’을 정성껏 결합시킨 농담을 구사했으나, 웬걸, 학생들은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 농담은 정말 웃길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국가론 위에 인문학적 저항정신이 맛소금처럼 뿌려져 있는데! 학제간 융합 연구의 결정체인데!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잖아요. ‘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라고. 제 농담은 그 말에 대한 각주 아닐까요? 그 언론인의 내면에 깃든 시란 설익은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자상하게 해설해주었으나 학생들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썩은 유머로 인해 내면이 침범이라도 당한 듯.

한국 대학에서는 교수가 아무리 썩은 유머를 던져도, 학생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인데. “산채 비빔밥이 맛있을까요, 죽은 채 비빔밥이 맛있을까요” 따위의 심하게 부패한 개그에도 학생들은 박장대소를 해준다던데. 학생들이 쉽게 웃어 주기 때문에 교수들의 농담력이 날로 시들어가는 거야. 이러던 K교수마저도 막상 학생들의 무관심에 맞닥뜨리자 그만 가냘픈 내면이 침범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K교수는 지식인의 전매특허인 고도의 자기 합리화를 통해 강의를 수습하기로 하였다.

“교수님은 왜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는 거야, 라고 여러분은 항의할 수 있겠지요, 속으로. 재미없는 농담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탄압하는 데 바로 선생님의 뜻이 있는 거야. 교수는 대학 내의 국가야. 여러분들이 그동안 제대로 독서를 해왔다면 이 정도 농담으로 내면이 침범 당하진 않았겠지. 괴롭다고? 아프니까 청춘이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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