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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녀는 왜 ‘애제자 만들기’를 포기했을까?

입력
2017.09.08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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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신문과 TV에서 연일 보도된 여중생 폭행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격조하던 그녀가 많이 보고 싶어진 것은. 고등학교 동아리 모임에서 선후배로 만나 대학교까지 함께 다니며 꽤 밀도 있는 친분을 유지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국어 선생님을 꿈꾸던 그녀였다. 바람대로 사범대에 진학했고 졸업하자마자 임용돼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로 첫 출근을 하던 모습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10여 년 전 만났을 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이름하며 ‘애제자 만들기 프로젝트.’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후배는 서너 명의 애제자를 따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공식적인 절차는 없었다. 그저 그녀 혼자 진행하는 은밀하고 특별한 의식에 불과했다. 다만 애제자 선발 조건은 꽤 까다로웠다. 학업성적 하위 10% 이내에 다소 문제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아웃사이더일 것. 그렇게 마음속으로 고른 애제자가 주로 어울리는 친구는 누구인지, 학업에 싫증을 내는 요인은 무엇이며 아이의 잠재력이 발현되는 교과목이 있는지,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는지를 면밀히 파악한 뒤 티 나지 않게 애정을 쏟는다고 했다. 가령 얼굴 마주칠 때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지극히 사적인 안부 인사를 전하거나 취미생활 혹은 친구를 소재로 올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 번거로운 과제도구를 운반하거나 화단 청소가 필요할 때, 학생들에게 전달사항이 생길 때에도 종종 그 아이들의 힘을 빌었다. 신기한 건 그 미세한 관심이 불러오는 극적인 변화였다. 한 학기가 지나면 아이들의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표정과 말투가 변하고, 학년이 바뀔 즈음에는 그들의 미래 꿈과 세상을 보는 시선까지 몰라보게 달라진다는 얘기였다.

교육심리학자들은 흔히 이런 변화를 일컬어 ‘로젠탈 효과’라 부른다. 1968년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로젠탈이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한 후, 그는 작은 트릭을 썼다. 무작위로 뽑은 학생 명단을 교사들에게 건네며, 이들이 향후 발전 가능성 높은 상위 20% 학생들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8개월이 지난 후 다시 검사를 실시했다. 실험 결과 명단에 포함된 학생들의 평균 성적 및 지능이 다른 학생들보다 높게 나왔다. 교사의 기대와 관심이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로젠탈의 트릭이 아니더라도, 후배는 자신만의 ‘애제자 만들기’에서 적잖은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왜 아니겠는가? 벌써 그런 식으로 얻은 애제자가 스무 명도 넘는다고 말하던 그때 후배의 윤기 나는 목소리와 얼굴은 참 예뻤다.

생각난 김에 후배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애제자 프로젝트를 묻는 내 질문에 그녀는 주춤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득한 기억’처럼 느껴진다며 후배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가만히 이야기기를 들어보니 강건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주저앉히고도 남을 일들이 그 교단에서 여러 번 지나간 듯했다. 언론에 보도되는 사고 못지않은 일들을 교육현장에서 숱하게 목도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후배는 아이들을 탓하지 못했다. 정작 그녀의 마음을 다치고 절망하게 만든 건 이미 벌어진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학교와 교육당국, 그리고 학부모들의 태도였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아무도 사과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아요. 부모들은 학교의 관리 소홀만 탓하고, 학교는 교사들에게 나서지 말라 주문하고, 교육 당국은 문제를 감추는 데만 급급해요. 이렇게 무책임한 폭탄 돌리기 속에서 상처받는 건 결국 의지할 데를 잃은 아이들이에요.” 교단은 이제 밥벌이 현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고 자조하는 후배의 목소리는 마른 낙엽처럼 푸석푸석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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