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를 업고 다녀도 시원치 않다.” 최근 KBS 드라마국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달 31일 KBS2 ‘태양의 후예’는 시청률 33%(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하며 수년째 시청률 하락과 광고 기근에 허덕이던 KBS에 모처럼 활기를 불어넣었다. 중국에서의 수입으로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중국 판권 판매 가격은 회당 25만달러(약 3억원)로 총 400만달러(약 48억원)를 벌어들였고, 간접광고(PPL)로도 약 40억원의 수익을 챙겼다. 방송가에서는 ‘태양의 후예’로 벌어들이는 총 수익이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태양의 후예’는 한 종합편성채널의 개국 드라마가 될 처지였다. 하지만 ‘로맨틱코미디(로코)의 귀재’ 김은숙 작가를 만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됐고 세상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김 작가이었기에 만사형통이었을까. ‘태양의 후예’ 성공 이면에는 자신을 버린 과감한 모험이 있었다. 김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로코 요소를 ‘태양의 후예’에 접목했으면서도 그 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이끌어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일명 ‘신데렐라 로코’, ‘캔디 로코’를 과감히 버렸다. 대중과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성공 공식과 자신만의 세계를 접고 새로 시작하며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이 TV안에 창조해낸 ‘김은숙 월드’를 진화시켜 새로운 드라마 세상을 연 셈이다.
김 작가는 시청률 50%를 넘겼던 ‘파리의 연인’(2004)으로 한국형 로코를 새롭게 제시했다. 30%대의 시청률을 보인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까지 그는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패턴을 고수하고 다졌다. 드라마 작가로서 정점을 찍고 있을 무렵 “김은숙표 로코는 이제 뻔해 식상하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타깃 연령대를 40대로 올린 로코 ‘신사의 품격’(2012)과 10대 로맨스를 표방한 ‘상속자들’(2013)은 20%가 넘는 시청률이 나오면 시청률 전선에서 선전했다. 하지만 김 작가가 선보여왔던 로코에 변주만 했을 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3년 전 김 작가는 ‘상속자들’의 제작발표회에서 “온갖 클리셰(진부한 표현이나 반복적인 문구)가 다 들어있다는 부분을 인정한다”며 “완전히 새롭진 않지만 지난 번보다는 달라졌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자기 복제’를 할 수 밖에 없는 드라마 작가의 숙명에 경계를 드러내는 답변이기도 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어쩌면 이 시기를 김 작가로서는 침체기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며 “기존의 로코로는 시청자들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로코에 실험을 가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태양의 후예’가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김 작가는 회당 5,000만원 이상의 원고료를 받는 스타 작가다. “(예전과)전혀 다른 내용을 써달라”고 드라마 제작사나 방송사가 제안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한 위치다. 후배작가가 쓴 원안을 바탕으로 협업을 하자는 제안 역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20년 경력의 한 방송작가는 “웬만한 방송작가들이었다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김 작가의 결정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작가는 모든 이들의 예상과 편견을 깼다. 후배인 김원석 작가가 공모전에 당선된 ‘국경 없는 의사회’를 바탕으로 ‘태양의 후예’를 공동집필 했다. 김 작가가 특전사와 의사 등 전문적인 영역에서 특수 상황에 놓인 이들의 사랑을 그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을 만하다. 하지만 김 작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군대를 배경으로 사랑을 풀어내는, 과감한 용기를 보여줬다.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시장을 염두에 둔 ‘맞춤형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100% 사전제작에 출사표를 던졌다. TV와 인터넷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한, 중국 내 사전 심의에 맞춘 치밀한 전략이었다. ‘태양의 후예’는 내수용이 아닌 철저하게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국내 드라마 시장에서 한 번도 제대로 시도한 적 없는 모험을 김 작가 스스로 선택했다.
내용에서도 변화를 시도했다. 말끔한 차림의 재벌남 대신 연인을 넘어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영웅형’ 남자주인공을 탄생시켰다. 미국 드라마처럼 한 회만 봐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회당 에피소드에 주력한 점도 눈에 띄는 차이다. 회를 이어서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한국드라마의 특성을 과감히 무너트렸다.
대중문화평론가 김경남씨는 “김 작가로 인해 저예산 장르로 치부되던 로코가 한 단계 진일보했다”며 “자기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태양의 후예’는 글로벌 시장에 최적화된 콘텐츠의 롤모델이 됐다”고 평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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