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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밥상 하나 더 차리기와 3000억원

입력
2016.09.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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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경배 과학재단’ 출범식에서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홍인기 기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경배 과학재단’ 출범식에서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홍인기 기자

“어려운 이웃을 살폈으면 해, 특히 여성 가장들을 도왔으면….”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2003년 1월 숨을 거두기 직전 둘째 아들 경배를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이어 서 창업주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항상 식구들 밥상 옆에 작은 상 하나를 따로 차려 놓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 창업주의 모친인 윤독정 여사는 1932년 개성에서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윤 여사의 동백기름은 좋은 원료와 독특한 제조 비법으로 향이 좋고 윤기가 오래 가는 머릿기름으로 이름을 날렸다. 동백기름을 사기 위해 가게(창성상점)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윤 여사는 상점 한 편에 밥상을 하나 더 차려 밥보자기로 씌워 두곤 했다. 누구라도 가게를 찾았을 때 적어도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밥 때가 지나도록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경우에는 동냥 온 거지에게 상을 내 주기도 했다. 여섯 명인 자식들을 챙기는 것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윤 여사는 이렇게 주변부터 살폈다.

윤 여사의 행동은 신의와 인본을 중시한 개성상인(송상ㆍ松商)들의 상부상조 문화 아래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개성 인근에는 서로 도우면서 살 것을 강조한 ‘인바위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서부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십명씩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를 성가시게 여긴 안주인은 마을 뒷산의 사람 모양 바위의 한쪽 어깨를 떼어 내면 과객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한 노승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이후 손님들은 끊겼지만 동시에 서부자의 집도 가난해졌다는 내용이다.

열 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도와 개성에서 서울까지 71㎞(약 180리)를 자전거로 오가면서 원료 구매를 책임졌던 서 창업주는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다. 45년 서울 남대문시장 근처에 아모레퍼시픽의 모태인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세운 것도 어머니의 동백기름 장사와 나눔 정신이 토대가 됐다. 60년대 우리 사회에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이 숨지거나 큰 부상을 입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 가장들이 많았다. 서 창업주는 이들에게 방문 판매원이라는 일자리로 새로운 기회를 줬다. 물론 이런 방문 판매원 덕분에 태평양도 새로운 유통망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며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다.

서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도 그 뜻을 이어 2003년 ‘아름다운 세상 기금’을 조성,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희망가게’사업에 나섰다. 희망가게란 저소득 한부모 여성 가장의 창업을 도와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제도) 사업으로, 현재 280여곳이 운영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공모를 통해 선발된 희망가게 창업 지원자에게 담보ㆍ보증이 없더라도 최대 4,000만원을 연 1%의 상환금리로 빌려준다. 여성에게 받은 사랑으로 회사가 성장한 만큼 이를 다시 여성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게 서 회장의 의지다.

최근 서 회장은 사재 3,000억원을 출연, 기초 과학 육성을 위한 ‘서경배 과학재단’도 설립했다. 한 개인이 순수 기초 과학 분야 연구자를 지원하는 재단을 세운 것은 처음이다.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재단 설립 배경과 관련, “아버지는 항상 과학 기술 발전 없이는 사회 발전도 없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인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소명을 꿈꿔왔다”고도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나눔 실천 철학을 이제 손자가 사회와 국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확대한 셈이다. 80년 전 밥상 하나 더 차리기가 3,000억원 과학재단으로 이어졌다.

곧 추석이다.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게 되는 때다. 서 회장의 통 큰 기부의 씨앗이 한국 재계에 널리 확산되길 기대해 본다.

박일근 산업부장 ikpark@hankookilbo.com

박일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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