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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로명주소의 현주소

입력
2017.06.0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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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 주소가 표류하고 있다. 시행한 지 3년도 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집을 구주소로만 기억하며, 관공서나 기타 업무에서도 구주소와 신주소가 병용되고 있다. 아직 신주소는 사용하기에 불편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왜 이런 혼란이 계속되고 있을까.

이 화두를 논하기에 앞서, 정부가 굳이 도입하려는 도로명 주소는 구주소보다 더 좋은 체계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일단 답은 긍정적이다. 이는 도로명 주소가 확립된 외국에 지도 한 장을 들고 여행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다. 낯선 도시에서 자신이 전혀 모르는 주소를 찾아가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주소가 서초 4동 364-20번지라면, 여행자가 서초 4동까지 찾아간다고 해도 임의대로 붙여놓은 364-20이 어디인지 감을 전혀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주소가 강남대로 83길 30번이라면, 여행자는 강남대로를 찾고, 그 가지에서 83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가 30번을 발견하면 된다. 적어도 강남대로라는 표지판을 찾기만 하면 여행자는 목적지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장점은 화재나 범죄신고 시에도 발휘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해보자. 신고자의 주소가 83길 30번이라면, 신고자는 급박한 상황에서 화재가 난 곳은 대략 이 길을 따라 올라간 83길 50번에서 60번 사이라고 신고할 수 있다. 구주소 체계라면 동네 사람이라도 옆 주소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요는 그 주소를 떠올렸을 때, 공간적인 감각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구주소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도로명주소는 가능하다. 이 장점만으로도 신주소는 구주소보다는 우월한 체계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구주소는 1910년대 일제가 도입한 방식이다. 당시 일제는 전답에 세금을 매겨야 했기에 땅에 임의대로 번호를 붙여 주소를 만들었고, 이것이 아직까지 사용되는 지번 주소다. 반면 도로명 주소는 장점이 많아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를 깨달은 우리나라도 발맞추어 2014년부터 도입되었고, 정부의 홍보도 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도 새로 도입된 주소 체계가 난항을 겪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거나 홍보가 아직 덜 되었다기보다 우리 사회가 극도로 디지털화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낯선 곳을 찾아갈 때, 지도 한 장을 들고 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 각자 보유한 스마트폰에 주소를 입력하기만 하면 지도에 현 위치와 찾아갈 곳이 즉각 표시된다. 화재나 범죄 신고도 전부 GPS로 표시되기에 접수를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의 위치를 즉각 알 수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 여행 온 외국인도 스마트폰에 주소를 입력해 목적지를 찾아간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서 신주소의 장점은 희석된다. 사람들에게는 이미 100년을 넘게 쓴 익숙한 주소 체계라는 점만이 부각되고, 왜 새로운 주소 체계를 사용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온라인에 주소를 입력해보면, 도로명 주소는 큰 공간을 찾고 길을 세부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시와 구를 입력한 후 도로명과 번지, 세부 주소를 입력해야 하지만, 구주소는 한두 번에 입력이 가능하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서는 신주소의 단점이 드러나 사람들의 불편함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가 궁극적으로 좋은 주소 체계인 것은 맞다. 하지만 도입이 늦었고, 사회가 달라진 탓에 어정쩡한 제도가 되고 말았다. 이제 이 이원화된 주소 체계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미 막대한 예산을 들였고 당위성이 있는 사업이므로, 백지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달라진 시대를 깨닫고 미비점을 보완해 안착시키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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