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혜정 기자

김창선
PD

한설이
PD

등록 : 2017.08.12 09:00
수정 : 2017.08.12 15:40

[인물 360˚] “포로생활보다 더 끔찍” 최장섭 옹의 '군함도 3년10개월'

등록 : 2017.08.12 09:00
수정 : 2017.08.12 15:40

“제발 우리 장섭이 좀 살려주십시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탄 기차를 붙든 채 울며 빌었다.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뭔가 바치기라도 하면 아들을 풀어줄까, 없는 살림에 떡을 빚어 기차에 넣어봤지만 허사였다. 보드랍던 떡이 딱딱하게 굳어 쉬어버릴 즈음, 아들은 이미 바다 한가운데 군함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74년이 지났지만 노인은 여전히 가족과 헤어지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지옥섬’으로 가게 된 날이기에 더욱 그랬다. 지난 8일 대전의 자택에서 만난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 최장섭(90)씨는, 군함도에서 지내던 3년 10개월이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군함도 강제징용피해자인 최장섭씨는 지난 8일 대전의 자택에서 만나 “군함도에서 지냈던 하루하루는 지옥과도 같았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김창선PD

이름도 세월도 빼앗긴 3년간의 포로생활

1943년 2월21일은 최씨가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군함도에 끌려간 날이다. 고향인 전북 익산(옛 이리)의 작은 면에선 그를 포함해 5명의 소년이 ‘전시 동원 노무자’란 이름으로 징용됐다. 동네 주민들은 ‘이렇게 어린 아이들까지 데려가야 하냐’며 항의도 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부역자들이 섞인 모집담당자들의 입에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바닷속 비좁은 탄광에서 일하기 용이한 어린 소년들만 색출해냈던 검은 속내는 숨긴 채 말이다.

최씨가 도착한 장소는 하시마(군함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최대 군수기업인 미쓰비시가 탄광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소년들은 이 곳에서 옷과 소지품을 비롯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굴욕적인 일본식 이름 ‘야마모토(최씨의 일본식 발음)’마저 빼앗아간 일본 관리자들은 그를 ‘로쿠센이찌햐쿠고(6105)’ 라는 번호로 불렀다.

군함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 EBS 역사채널e '지워지지않는 상처 강제동원' 캡쳐.

그날부터 소년은 하루도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팬티만 입은 채 3교대로 탄광에 들어가 쉴 틈 없이 일했다. 관리자들이 갱도 아래로 내려주는 주먹크기의 콩밥 한 덩이를 삼키고 나면 다시 곡괭이를 들어야 했다. 최씨는 탄을 캔 자리를 메우는 ‘주땡’이라는 작업을 했다. 갱도가 언제 무너질 지 모른 채 목숨을 내건 채 일을 했다. 그 역시도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다.

잠시 쉬는 동안에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징용자들을 아파트형 건물의 맨 아래층에 살게 했다. 햇빛은 전혀 들지 않고 찬 바닥에 바닷물이 스며들어 늘 습기가 들어왔다. 비좁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 겨우 누우면 사방에선 ‘아이고 나 죽겠다’는 조선인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몸은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탄가루로 몸이 까매진 조선인들에게 ‘더럽다’며 욕을 했다. 포로보다 더한 생활이었다.

탈출은 목숨을 걸어도 쉽지 않았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간에 붙잡히거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최씨 역시 한때 뗏목을 만들어 탈출을 감행했지만 바다를 겨우 건너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붙잡혔다. 그 후 이어진 건 끔찍한 매질이었다. 최씨는 고무 채찍에 피가 묻어 날 때까지 계속 맞아야만 했다.

군함도의 조선인 합숙소 벽에는 "어머니 보고 싶어" "고향에 가고 싶다" 등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가슴 아픈 절규가 새겨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사전

“영화 ‘군함도’ 좀 더 담백했으면…”

최씨는 지난 26일 서울 용산 CGV에서 영화 ‘군함도’를 봤다. 일제강제징용문제를 다루는 행정안전부가 영화 개봉에 맞춰 최씨를 비롯한 생존자들과 유족 50여명을 초대한 것이다. 최씨는 영화가 대체로 사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최씨는 우선 영화에 등장한 ‘소희’와 같은 어린 소녀는 군함도에선 못 봤다고 했다. 영화에서 소희는 강제 징용된 아버지 ‘강옥’을 따라와 고초를 겪는 인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강제징용이 시작된 후 끌려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어린 소년이었다. 때문에 최씨는 “영화에는 상상이 덧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조선인의 시체를 한데 모아 불태우는 장면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최씨는 “하시마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이 많은데 일본인들은 그 시체를 거둬 잘 정리한 뒤 다 한국으로 보냈다”며 “그거 하나는 참 착하게 잘 했다”고 회상했다.

최장섭씨는 “영화 ‘군함도’의 등장인물 ‘소희(왼쪽 위)’와 같은 어린 소녀는 군함도에선 못봤다”고 말했다. 조선인 징용자들끼리 모여 탈출을 모의하는 장면(오른쪽)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힘을 합쳐 일본인 관리자들과 맞서 싸우고 탈출을 감행하는 내용에 대해 최씨는 “전혀 불가능하다”며 딱 잘라 말했다. 최씨는 “일본 사람 앞에서 죽은 듯이 고개 숙이고 꾸벅꾸벅 해야지 조금이라도 반대의사를 표시하면 뼈도 안 남는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조선인들이 촛불을 들고 탈출을 모의하던 장면 역시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씨는 “영화가 좀 더 담백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일본 사람은 그들이 한 일대로, 한국 사람은 또 그들이 한 대로 영화에 담았으면 했다”며 “영화내용은 각본에 달려있는 만큼 상상과 실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이 더 이상 남에게 고통 주지 않길 바란다”

긴 세월을 따라 최씨의 분노는 한이 됐다. 하지만 군함도가 2015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으로 인정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최씨처럼 군함도에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은 파악된 것만 약 800명, 사망자는 121명이다. 하지만 일본은 군함도를 홍보하면서도 광산노동자 중 조선인 징용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최씨는 약 20년 전부터 기억을 되살려 과거의 고초를 기록하고 있다. 그를 비롯해 피해를 증언할 생존자가 6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더 늦기 전에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씨는 지금이라도 일본이 과거를 뉘우치고 사죄하기 바란다. 잘못을 반성하지 않으면 언젠가 돌려받게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저처럼 쓰라린 고통을 겪고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이 더 이상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양심을 되찾길 바랍니다.”

최장섭씨가 지난 8일 대전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군함도 강제징용당시 기억을 기록한 일기장을 보여주고 있다. 김창선PD.

대전=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한설이 PD ssoll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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