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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입력
2018.04.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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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일본 미제사건 갤러리’는 일본의 유명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실제 당시 'SOS' 문구 사진.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실제 당시 'SOS' 문구 사진.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땅 밑에서는 용암이 펄펄 끓고,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수백만 년 동안 위협적인 입김을 뿜어내는 곳.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중앙에 자리잡은 다이세쓰(大雪)는 최고봉 아사히다케(旭岳ㆍ2,290m)를 중심으로 산 10여 개가 원을 그리듯 흩어져 있는 화산군이다. 여의도 면적 3분의 2(22만㏊)에 달하는 국립공원이 있고, 토착민 아이누족이 ‘신들의 정원’이라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협곡, 폭포가 지천에 널린 다이세쓰가 갑자기 매스컴의 주목을 끌게 된 건 1989년의 일이었다.

그 해 7월 24일. 아사히다케 추베쓰(忠別川)강 인근 해발 1,500m 상공에 홋카이도 경찰 소속 헬리콥터 한 대가 나타났다. 남성 등산객 2명의 조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다. 경찰은 조난 추정 장소에서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습지에 다다랐을 때 심상치 않은 풍경을 목격했다. 누군가 자작나무 가지를 모아 만든 3m 크기의 ‘SOS’ 글자. 구조요청 문구였다. 정황상 조난당한 등산객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경찰은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글자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등산객들을 구조했다. 그러나 SOS 글자에 대해 묻자 등산객들이 내놓은 답은 뜻밖이었다. “저희가 만든 게 아닌데요.” 이른바 ‘일본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 다이세쓰 SOS 조난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등산객들이 만든 게 아니라면, SOS 글자는 근방의 또 다른 조난자가 만든 것이 분명했다. 경찰은 글자 근처를 이 잡듯이 수색해 회색 가방 1개, 동물에 물린 흔적이 있는 백골 시신 1구를 발견했다. 가방 속 물건은 백골 시신의 성별을 남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남성용 세면용품, 녹음기, 카세트테이프 4개. 경찰은 테이프에 주목했다. 테이프 3개에는 인기 애니메이션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주제곡 등 별다른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 젊은 남성의 애타는 외침이 녹음된 테이프가 문제였다.

“SOS, 도와달라. 벼랑 끝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테이프가 발견된 곳은 벼랑이 없는 평지였다. 그런데 남성은 “벼랑에 고립됐다”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경찰은 고민에 빠졌다.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따져봤다. 만약 테이프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백골로 발견된 남성이라면, 그는 왜 멀쩡한 평지 위에서 ‘벼랑에 갇혔다’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을까.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3자로 가정해도 의문은 남았다. 대체 왜 그는 이런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고 산에 오른 것일까.

전담 수사팀이 꾸려졌지만, 수사는 공회전을 거듭했다. SOS 문구, 카세트테이프, 백골.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세 가지 증거를 한데 묶고, 매끈하게 풀어낼 논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사히카와 의대(旭川医科大学)에 의뢰한 백골 감식 결과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를 받아 든 경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골의 주인이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

경찰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2차 수색에 나섰다. 1차 수색 지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백골 시신 1구가 발견됐다. 타살 흔적은 없었다. 백골과 함께 발견된 유류품을 토대로 경찰은 변사자의 신원을 파악했다. 백골의 주인은 발견 5년 전인 1984년, 다이세쓰에 올랐다가 연인 A씨와 같이 연기처럼 사라진 40대 남성 회사원 B씨였다. 경찰은 B씨가 테이프 속 목소리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1차 수색 당시 가방에서 발견된 실제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1차 수색 당시 가방에서 발견된 실제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B씨의 신원이 파악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1차 수색 당시 발견된 유골이 B씨의 연인 A씨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유가 있었다. 먼저 B씨가 발견된 장소와 A씨 추정 유골 발견 장소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또 A씨 추정 유골이 “최대 5년 전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감정서 내용을 확보했다. DNA 검사 결과, 유골은 A씨가 맞았다. 사건 해결의 8부 능선을 넘은 듯했다.

하지만 B씨 부모가 경찰 조사에서 내놓은 대답은 뜻밖이었다. 테이프 속 목소리가 아들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수십년 동안 거의 매일 들었을 아들 목소리를 부모가 착각할 리 없었다. 경찰은 3차 수색을 통해 휴지, 만화책, 명함 등 잡동사니로 채워진 가방 1개를 발견했다. 사건 해결에 고무적인 분위기가 감지됐지만, 한편으론 이번에도 ‘희망 고문’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수사팀 내부를 맴돌았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들어맞았다.

경찰은 1차 수색 때 가방에서 채취한 DNA와 3차 수색 때 가방에서 채취한 DNA의 대조 분석을 의뢰했다. 결과는 ‘일치’. 하지만 휴지 등 3차 수색 때 발견된 유류품들의 시간대가 1983년으로 확인되면서 사건은 더욱 꼬여버렸다. A, B씨가 실종된 건 1984년. 즉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경찰은 테이프가 제3자에 의해 녹음되고 AㆍB씨 유골과는 관련이 없다고 판단, 같은 해 8월 5일 수색 중단을 선언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주만의 일이었다.

과연 테이프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AㆍB씨는 어떤 이유로 죽음에 이르렀던 걸까. 무엇보다 ‘SOS’라는 글자는 대체 누가 만든 걸까(나뭇가지에선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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