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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말만으로도 기쁘지 않냐고? 그렇다 기쁘지 않다

입력
2014.10.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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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기쁨 아닌 죽어나는 계절...들깨 수확도 베고 말리고 털고...갈아서 기름 만들자면 10여 단계

시골 내려오기 전에 꾸었던 꿈은 트랙터 몰면서 논밭 갈려 했는데 소형 경운기 값이 300만원이나

삽·괭이 등 농기구도 만만찮아...낫 하나도 부추낫·조선낫·풀낫...철물점선 '귀촌세트'판매 안하나

수확의 결실을 맺기까지는 쉼 없는 관심과 노동이 필요하다. 바닷물을 분무기에 담아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뿌렸다. 작년에 군청 지원을 받아 70만원에 구입한 분무기다.
수확의 결실을 맺기까지는 쉼 없는 관심과 노동이 필요하다. 바닷물을 분무기에 담아 마늘과 양파를 심을 밭에 뿌렸다. 작년에 군청 지원을 받아 70만원에 구입한 분무기다.

작은 공구를 정리해 두는 공구판. 찾기 쉽게 합판에 못을 박아 걸어 두지만 사용하다 보면 이리저리 사라지는 게 한둘이 아니다.
작은 공구를 정리해 두는 공구판. 찾기 쉽게 합판에 못을 박아 걸어 두지만 사용하다 보면 이리저리 사라지는 게 한둘이 아니다.
고철 덩어리처럼 보여도 구입한 지 얼마 안된 신품종 관리기 세트이다. 밭의 흙을 곱게 갈거나 고랑을 만드는 데 없으면 안되는 필수 농기계 중 하나로 부속품까지 포함하면 가격이 300만원을 훌쩍 넘는다.
고철 덩어리처럼 보여도 구입한 지 얼마 안된 신품종 관리기 세트이다. 밭의 흙을 곱게 갈거나 고랑을 만드는 데 없으면 안되는 필수 농기계 중 하나로 부속품까지 포함하면 가격이 3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아침 일찍 들깨를 베러 나갔다. 들깨는 툭 건들기만 해도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한껏 여문 상태다. 어르신들 말씀이, 그나마 이슬이라도 머금은 상태에서 밑동을 꺾어야 손실이 적기 때문에 꼭 아침에 거둬야 한다고 하셨다. 내 딴에는 서두른다고 나갔지만 해는 이미 중천에 가까웠고 들녘엔 가을 수확의 움직임이 한창이다.

수확. 말만으로도 기쁘지 않은가. 하지만 반드시 기쁘지만은 않다. 농촌에서는 수확이 좋으면 좋아서 걱정, 나쁘면 나빠서 걱정이다. 풍년이 들었다 해서 부자 된 농사꾼 없고 흉년이면 다 망하는 거다. 남들 다 흉년일 때 나 혼자 풍년이라면 돈 좀 벌겠지만 그럴 일은 개구리 턱에 수염 날 확률이랑 비슷하다. “풍성한 곡식을 거둬들이는 손길에 기쁨이 가득...” 하면서 수확을 얘기하는 뉴스를 보면 “이걸 확!”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실 나도 전과가 있다. 높은 양반들이 볏 다발을 한아름 안고 어색하게 웃으면 오히려 환하게 보이는 사진을 찍어 댄 적이 있다. 촬영만 끝나면 웃음기 바로 접고 옷에 묻은 나락 털어내며 갈비탕 먹으러 가기 바빴던 사람들. 당시 논두렁에 앉아서 지켜봤을 농민을 생각하면 용서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수확의 기쁨’은 멀리서 들판을 내려보던 옛날 지주나 양반들의 헛소리였을 듯 싶다.

가을은 사실 수확 때문에 죽어나는 계절이다. 봄철에 야심 차게 파종했던 씨앗들이 산더미 같은 일이 되어 돌아온다. 들깨를 베면서도 고마운 건 둘째 치고 ‘뭐 할라고 이렇게 많이 뿌렸을까’ 싶은 생각이 열두 번도 더 든다. 베어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천막 펼쳐서 잘 말려야 하고, 그 속에 들어 앉아서 막대기로 때리며 털어야 하고, 떨어진 들깨만 골라 잘 추슬러야 하고, 들깻대는 정리해 잘 묶어 둬야 하고. 그러고도 또 키질 해서 갈무리까지 해야 가루로 갈거나 기름으로 짜서 입으로 들어가는 거다. 작물 별로 수확에만 10여 단계의 수작업이 필요한 셈이다. ‘이런 거 한꺼번에 쫙 해주는 기계 없나’ 싶지만 그런 도깨비방망이는 없다.

하늘은 가을인데 땅에는 겨울과 여름뿐이다. 오전 해 올라온 후 잠깐 가을일까, 그 앞으로는 덜덜 떨다가 뒤로는 다시 땀 범벅이다. 코끝에 싸하던 아침공기가 아랫배로 이어졌는지 비상 신호가 오는데 농막까지 가기가 귀찮았다. 약간 급한 기운도 있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어렸을 적 외갓집 옥수수 밭에서 일 처리하고 옥수수 잎으로 뒤처리 했다가 쓰라려 죽을 뻔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후 외과 질환도 그 때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낫을 던져놓고 뒤를 오므린 채 장화 바닥 질질 끌면서 농막으로 가야 했다.

식은땀 끝에 한 숨 한 번 쉬고 나니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날아가 듯 비음 섞인 목소리의 DJ가 남자 초대손님을 불러 웃느라고 바빴다. “남자들이 여자 마음을 이렇게 몰라서야...” 어쩌구 하면서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하는 말을 ‘여자어(語)’라고 말해 줬다. 예를 들어 남자가 “백반 먹을까?” 물었을 때 “나 배불러” 이러면 더 좋은걸 먹고 싶다는 소리고, 먹다 말고 여자가 “배불러서 그만 먹을래” 이러면 “다른 거라도 주문할까?” 혹은 “더 약해지면 어쩔라고 그래. 천천히 더 먹어” 이래야 된단다. 나 참, 애초에 남녀는 종(種)이 다른 동물이고 어쩌다 말이 통해서 슬픈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게 평소 생각인데, 이제는 “나 아파” 이래도 “그래 자기 예뻐” 이래야 한다니 요즘 애들 연애하기가 가을 일만큼 힘들겠다.

다시 들깨 밭으로 올라가는데 아내와 간전댁할머니가 와 계셨다. 토란대 수확을 도와주시겠다고 성화셔서 모셔왔다는데 무 솎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아내가 학교 수업하러 다녀온다고 농장을 나서자 마자 장씨 아저씨가 밭으로 올라오셨다. “할매! 오랜만에 오셨네. 얼굴 좀 보여 줘요. 어디 편찮으시면 여기 못 오실 텐데. 얼굴 함 보장께” 두 분은 예전에 비닐하우스가 이웃해 있어 서로 잘 아시는 사이다. 얼굴을 땅에 묻고 계시던 할머니가 겨우 허리 한 번 펴셨다. “드러눕기 전에 가야지 뭐 할라고 오래 산다요. 나이 80은 생각도 안했구마.” “아 20년은 더 살아야지 뭘 벌써 죽는 얘기를 해 싼대요. 얼굴 깨끔허니 좋으시구마.” 아저씨는 여자어를 아시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도 따라 웃으신다.

던져놨던 낫을 못 찾고 다른 걸 가져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읍내에서 카센터 운영하는 친구다. “어이, 일전에 트럭 얘기했었지. 괜찮은 게 있는데 함 볼텨?” 그전에 1톤 트럭 중고차 하나 구하면 좋겠다고 얘기 한 적이 있었다. “그래? 얼마래?” “2003년 형인데 3백이면 되겄구만.” 혹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곧 연락 주겠다며 끊었다. 트럭 한 대만 있으면 짐차 겸용으로 쓰는 지금 SUV를 처분하고 가벼운 차로 바꿔 구성을 갖추고 싶었다. 농사지으려면 트럭 쓸 일이 다반사인데 매번 이장이나 후배에게 빌려 쓰는 것도 미안했다. 트럭을 끝으로 이제 큰 돈 들어갈 곳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원래 시골에 내려오기 전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은 자그마한 트랙터 몰고 논밭 갈면서 남는 시간에 목공일도 좀 하는 그런 거였다. 갈고 뿌리고 거둬들이면 끝. 헌데 큰 착각이었다. 일도 일이지만 농기계 값이 그랬다. 수천만원에서 억대를 넘나드는 트랙터는 둘째 치고 경운기 값 대기도 어려웠다. 엔진 달린 앞머리만 400만원이 넘었고 짐칸, 로타리(로타베이터), 쟁기까지 갖추려면 또 100만~200만원이 든다. 그나마 구이장님(전 이장님을 이렇게 부른다)이 주신 경운기를 수리해서 쓰는 데만 60만원이 들었다. 소형 경운기인 관리기도 이것 저것 부속까지 구입하자면 300만원은 족히 든다.

“야 시골엔 눈 먼 돈 많다며. 군청 가서 좀 땡겨 오면 되지 않냐?” 얼마 전 찾아 왔던 선배가 농기계 얘기를 나누다 한 소리다. ‘눈 먼 돈? 눈이 멀었다는 건지 눈이 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골 돈이 눈이 멀었으면 서울 돈은 눈을 뜨고 댕깁디까? 뭐 서울의 구청 공무원은 눈 시퍼렇게 뜨고 시골 군청 공무원은 게슴츠레 뜬답디까?’ 눈탱이 얻어 맞을 얘기만 계속 하길래 언짢은 티 팍팍 내서 얼른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돈 없어? 꿔다 써! 싸다며” 말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나. 1% 저리융자도 빚이요, 5년 거치 10년 상환도 빚이다. 사채업자가 할만 한 소리만 하다 올라갔다.

기계뿐 아니라 농기구도 만만치 않다. 호미, 낫, 삽, 괭이부터 시작해 수레, 전지가위, 분무기까지 구입해야 하는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낫 하나만도 부추낫, 조선낫, 풀낫 이렇게 여러 가지고, 삽도 쓰임새에 따라 서너 가지가 필요하다. 처음에 사야 할 물건을 한꺼번에 구입할 수만 있어도 덜 열 받았을 거다. 밭 정리 하다 보니 이게 필요하고, 또 옮기다 보니 저게 필요하고 해서 하루에만 서너 차례 철물점을 다녀야 했다. 시간도 아깝고 길바닥에 뿌린 기름값도 억울했다. 철물점에서라도 ‘귀촌세트A’, ‘귀농세트B’ 식으로 한꺼번에 팔고 할인도 해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나.

고장은 또 얼마나 자주 나는지. 예초기가 안 돌아가서 수리점 가면 부품 하나 갈고 2만원, 동력분무기도 고무패킹 교체했다고 5만원. 뭐 한 2년이면 수리비만 기계값 만큼 들어간다. 수리점 직원에게 “왜 이렇게 고장이 잘 난대요?” 물으니 “아버님이 관리를 잘 하셔야죠. 기계는 손봐주는 만큼 오래가는 것이구만요” 얘는 형님이라고 해도 되겠구만 꼭 아버님이란다. “당연한 소린데 그게 쉬운가요” 했더니 “아님 자주 오시는 수 밖에 없지라.” 한다. 협박인지 가르침인지 모르겠지만 억울하다. 자동차가 그렇게 고장이 잦으면 난리가 났어도 수 십 번 났고, 리콜을 했어도 수 백 번 했을 텐데. 돈은 중형차 사는 만큼은 들었는데 말이다.

제일 큰 걱정은 사고위험이다. 전동전지가위에 손가락 잃은 사람, 관리기 손잡이에 갈비뼈 부러진 사람, 경운기 자빠져 다리 부러진 사람 등, 일하다 다쳤다는 얘기가 끊이질 않는다. 다치고서 몸 고장 안 나면 다행이다. 경운기 운전하다가 일반 차량과 충돌사고가 나면 치명적이다. 안전장치 하나 없는 오픈카 상태에서 부딪히니 경운기 보다 더 멀리 날아가야 운 좋게 살아나고 최소 복합골절을 입는다. 그런데도 다친 사람 대부분은 아픈 몸 걱정보다 남은 일 걱정을 하며 지낸다. 살아나도 살아갈 게 걱정이다.

나도 지난번에 경운기 몰고 가다가 좁은 길에서 대형차를 만나 논으로 빠질 뻔 했던 이후로는 운송수단으로 쓰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더 트럭이 필요했다. 가격대도 괜찮고 타이어도 교체한 지 얼마 안돼 돈 들어갈 것도 별로 없다고 했다. ‘아내만 오케이!하면 지른다.’ 마침 아내가 글쓰기 수업 마치고 돌아와 작업용 와이셔츠에 몸뻬바지를 올려 입고 밭으로 왔다. 간전할머니가 보며 웃으시다가 “애덜 갈치니라고 애썼을 거인디 걍 쉬지 머할라고 온댜”하며 맞으신다. 나도 반가워서 “모구 없응게 일 좀 하실랑가?” 했는데 표정이 금방 안 좋아진다. 트럭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타이밍이 아니다. 일단 분위기 바꿔서 다시 얘기해야지.

농장주 자세로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아내가 다시 돌아왔다. 얼굴에 땀도 좀 흐르고 해서 약간 불쌍한 표정을 더해 재시도 했다. “고사장이 전화했는데 트럭 좋은 게 나왔다네. 남 주긴 아깝대.” 내 쪽으로 오던 아내가 비스듬히 방향을 꺾어 할머니한테로 향했다. 언급을 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거 봐, 내가 승용차 사자는 것도 아니고 외제차 사자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니까 좋은 물건 싸게 사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될 일이야?” 아내가 마지 못해 말문을 열었다. “작년에 저장고도 지었고, 관리기도 샀고, 올해도 돈 들어간 게 많으니까 내년에나 생각해 보면 안될까?” 내년이라고 돈이 어디서 생기는 것도 아닌데, 여태껏처럼 적자만 나면 더 힘들어지겠다 싶었다. “내가 사치 부리자는 거야? 이게 욕심이야? 농사에 필요한 기계야 기계! 그냥 또 경운기 몰고 다닐까. 엉!” 피치를 올리는데, 갑자기 허리를 숙였던 아내가 낫을 들어 올렸다. “기계 타령하지 말고 이런 거라도 잘 챙겨 좀!” 하필이면 잃어버렸던 낫이 아내 발끝에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라디오에서 교육 받은 여자어를 구사했다. 아내를 그윽하게 훑어보며 “괜찮네, 당신은 어떻게 몸뻬도 어찌 그리 잘 어울려~.” 했더니 아내가 한마디 날리며 내려가 버린다. “또 낮술 먹었구만. 술 값으로 벌써 트럭 샀겄네!”

점심 때도 안됐는데 별소리 다 듣고 산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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