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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벨촛불상 수상자들

입력
2016.11.2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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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째 분노와 배신감과 경악의 시간을 살고 있다. 처음 최순실 국정농단 기사가 터진 후 날마다 충격적인 소식과 거듭되는 거짓말, 적반하장의 변명과 떠넘기기를 목격하고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언제나 그 이상의 비리와 의혹이 막장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다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세일하는 코트 하나를 살까 망설이다 돌아서며 알량한 통장 잔고가 새삼 우울했다. 결석하지 마라, 리포트 잘 써서 제 때 내라 아이에게 잔소리 하다가 허탈해졌다. 나는 왜 사소한 불법 하나 저지르지 못하고 이렇게 비루하게 살고 있나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토요일에 광화문으로 갔다. 나처럼 권력과 거리가 멀고 나처럼 가난하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 내가 잘못 산 것이 아님을 내 혼이 비정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광장에서 만난 것은 끝없는 인파였다. 한 발자국 옮기기도 힘들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포옹하듯 서있어야 했다. 깃발들이 펄럭였다. 심장 박동이 요동쳤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 익숙한 단체들의 깃발 사이에서 ‘장수풍뎅이연구회’라고 쓴 깃발이 나부꼈다. SNS에는 범야옹연대, 민주묘총, 전견련, 국경없는어항회, 전국깡총연합, 얼룩말연구회 등 재미있는 깃발 사진들이 속속 올라왔다. 몇 주 만에 처음 크게 웃었다.

조PD, 정태춘, 이승환의 노래가 라이브로 들려왔다.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씩 하는데 다들 청산유수로 옳은 말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차벽이 된 경찰버스에 예쁜 꽃 스티커를 붙였다. 의경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 마음인들 여기를 막고 서있고 싶겠어?’ 안쓰러워 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집회가 끝나자 너 나 할 것 없이 여기 저기 널린 쓰레기를 모았다. 재치 있고 용감하고 정의롭고 착하고 배려심 많은 대한민국의 선남선녀들이 모두 광화문에 모인 것 같았다. 혹시 연말에 시상식을 하면 모두가 하나씩 상을 받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오래 전 SK텔레콤에서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TV 광고를 만든 적이 있다. 광고 속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수상자였다. 식구들 앞에서 노래자랑을 하는 꼬맹이는 ‘대한민국 가수왕’, 아들이 쏘는 장난감 총에 맞아서 아픈 척 하는 아빠는 ‘대한민국 연기대상’, 도로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은 ‘대한민국 남우 조연상’, 막 태어난 신생아는 ‘대한민국 신인상’… 이런 식이었다. 그 광고처럼 광화문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賞’편 카피

대한민국 가수왕

대한민국 연기대상

대한민국 코미디 대상

대한민국 남우 조연상

대한민국 베스트 드레서

대한민국 공로상

대한민국 신인상

대한민국 사람 모두에게

이 상을 드립니다.

사람을 향합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SSIBmT877bk

(SK텔레콤 광고 링크)

대학 다닐 때도 전혀 시위에 참여한 적 없던 친구가 초등생 아들을 데리고 광화문에 나왔다. 앞으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해외여행을 갔던 다른 친구도 공항에서 곧장 광화문으로 달려왔다. 내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무임승차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원주에 사는 동생이, 부산에 사는 옛 동료가, 미국서 출장 온 친구가 광화문에 모였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치다가, 길바닥에 앉아 비싼 가수들의 라이브를 공짜로 듣다가,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 한 시인데 버스는 만원이었다. 가까이 느껴지는 낯선 이들의 체온이 싫지 않았다. 졸리고 다리가 아팠지만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오늘 광화문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마음 속으로 상을 하나씩 수여해 봤다. 아카데미 깃발상, 칸 평화행진상, 베를린 도로청소상, 대종상 시민연대상, 청룡영화제 시위주연상… 그리고 나도 백만명의 노벨촛불상 수상자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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