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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규범 과잉의 폭력성과 비극

입력
2018.07.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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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개인에 대한 평가는 서로 많이 다를 수 있겠으나 한국 정치 지형의 다양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진보 정치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인 일이다. 또한 충격적인 일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에 비해 정의로움, 공정함의 가치를 더 강조하던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불법적인 댓글활동으로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를 받는 관련 사건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 사실을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다는 사실은 좀 받아들이기 힘들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정치인들이 부정한 청탁과 무관하더라도 법에 의하지 않은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고 그것으로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 대해서만 유독 관대한 잣대를 들이댈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 과잉의 문제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의 여러 맥락에서 부패와 불공정의 경험을 하게 됐다. 이러한 부패와 불공정은 그에 대한 정치적 관심에 비례해서 더 엄격하고 복잡다층적인 규범들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법적인 규범이 많아지고 엄격해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비례해 부패가 감소하고 공정함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각종 법률들과 특별법의 내용대로라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매우 깨끗한 환경에서 높은 최저임금에 의해 뒷받침되는 충분한 복지를 누리며 부패와 각종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오히려 규범 과잉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한 폭력성과 어차피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의 치명적인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대로 하겠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더 이상의 협상과 배려는 없다는, 법에 의해 강자에게 보장된 강제력을 사용해 상대방을 파괴하겠다는 폭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규범 과잉은 오히려 사회 저변의 준법의식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지나치게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결국 누구도 완전히 지키기 힘든 내용이 규범으로 강제되고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역설적이게도 규범 경시의 경향이 발생한다. 어차피 누구도 다 지킬 수 없었던 법이었으므로 규범 위반의 적발 및 처벌은 쉽게 불운의 탓으로 돌려진다. 또는 힘의 경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다음번에는 꼭 이겨서 그 법을 무기로 삼아 다시 상대방을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비극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시점에 권력을 가진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다. 마음만 먹으면 권력에 저항하는 상대방을 어떤 죄목으로든 엮어서 처벌하고 사회적으로 망신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활력을 억제하고 사회의 퇴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합리적인 욕구와 기대에 반하는 규범은 관련된 사회적 행위들을 시장 바깥으로 밀어내고 더 심각한 불법이 거래되는 지하시장을 만들어낸다. 또한 공적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잉 규범으로 인해 물러선 빈자리가 능력은 부족하지만 적당하게 관리하면서 살아왔거나 보다 뻔뻔한 사람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규범이 가지는 권위의 표면적인 정당성은 그 시점에 선출된 대리인 다수의 의지이다. 그러나 정치과정에서 다수의 가변성과 취약성을 고려하면 그와 같은 표면적인 권위에만 의존해 불합리하고 지나친 규범을 양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규범적 합의들이 건전하고 건설적인 정치과정을 통해 공공선에 부합하는 내용들로 정리되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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