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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최순실에 가려진 것들

입력
2017.01.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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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청년. 그를 추모 하는 국화꽃과 메모가 붙어있는 스크린도어 앞에서 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지난해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청년. 그를 추모 하는 국화꽃과 메모가 붙어있는 스크린도어 앞에서 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지난해 우리는 20대 청년 세 명을 잃었다. 그리고 이내 잊었다. 최순실 우울증을 앓느라 더 까맣게 잊었다.

5월엔 컵라면 청년을 잃었다. 20세 청년은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졌다. 메피아(서울메트로+마피아)가 장악한 하청업체가 안전 수칙을 무시한 탓이다. 2인1조 현장 투입 규정이라도 지켰다면, 그래서 열차가 오는 걸 알려준 동료가 있었다면, 그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2,000원. 청년에게 업체가 줬다는 한 끼 밥값이다. 비정규직 청년은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을 유품으로 남겼다. 컵라면은 슬픔이었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세상을 얕본 아이와 코너링 운전을 잘한다는 청년이 사는 곳엔 존재하지 않을 종류의 슬픔이었다.

10월 김포공항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30대가 숨졌다. “회사에 늦을 것 같으니 연락해주세요.” 그의 마지막 말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청년 노동자들의 밥벌이는 오늘도 위태롭다. 비정규직은 여전히 2류 인간이고, 쉬운 해고는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은 달랑 6,470원이다. 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두고도 일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말은 청년들에게 사치다.

5월에 우리는 23세 청년을 또 잃었다.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자들이 무시해서 화가 났다”는 살인범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아무 여성이나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흉기를 휘둘렀다. 남성 다섯 명은 그냥 보낸 뒤였다. 청년의 젠더가 달랐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으로 애도하고 싸웠다. 그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반성,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우연히 살아 남은’ 여성들의 삶은 그러나 그대로다. 늦은 밤 혼자 택시를 타는 불안도,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남성을 마주치는 공포도, 몰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며 용변을 보는 수치도. 포스트잇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대통령은 염치 없이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을 들고 나왔다. 보호 받아야 할 연약한 여성은 자신뿐이라는 듯이. 정부는 낙태죄 처벌 강화를 추진하고 가임기 여성 지역별 분포 지도를 만들었다. 정부에게 여성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자궁’ 이었다.

9월엔 초인종 의인 청년이 떠났다. 28세 성우 지망생 안치범씨. 새벽 4시 화재 연기 냄새를 맡고 깬 그는 혼자 도망치지 않았다. 불길이 치솟은 5층짜리 빌라 집집을 다니며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깨운 이웃들은 살았지만, 그는 유독가스에 질식해 숨졌다.

그가 누른 초인종은 희망이었다. 세월호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무능하고 비겁한 국가 시스템의 대안이 결국 연대와 용기라는 각성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다 했는데, 필요하면 특공대까지 동원하라고 지시했는데, 중앙안전대책본부에 빨리 가지 못한 건 경호 문제 때문이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1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변명만 했다. 사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치범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올해 중 언젠가 대통령이 바뀔 것이다. 봄일 수도 있고 겨울이 될지도 모른다. 새 대통령이 나오면 따뜻하고 안전한 세상이 될까. 컵라면의 절망도, 포스트잇의 분노도 사라질까. 아닐 것 같다.

여야 대선주자들은 어떻게든 대선에서 이겨 청와대를 차지하고 보자고 달려들 뿐,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정치가 진영 싸움으로 작동하는 한, 아무리 열심히 투표를 해도 전쟁 같은 우리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 청년들이 던진 울림을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기억이다.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끈질긴 기억은 저항이고 개혁이다.

최문선 정치부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 근처 건물의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살해 당한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빼곡하게 붙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 근처 건물의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살해 당한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빼곡하게 붙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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