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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분투기] 맞춤형 보육을 앞둔 한 전업맘의 속사정

입력
2016.05.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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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려는데 원장 선생님이 웬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맞춤형 보육 시행 반대를 위한 서명을 받는다고 한다. 보육 시간 단축 및 보육료 삭감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서명을 부탁하기에 종이를 받아 들고 나왔다. 집에 와서 내용을 읽어보고 이름을 적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반대서명을 해봤지만 그 이름들이 힘을 발휘하여 요구가 관철된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엄마들과 어린이집들의 작은 외침은 묵살될 게 뻔했다.

7월부터 어린이집에서 맞춤형 보육이 시행되면 나와 같은 전형적인 전업주부들은 9시부터 3시까지만 아이를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아이의 등원 시간은 9시, 하원 시간은 4시 전후이니 당장 큰 문제는 없다. 엄마들이 진짜 우려하는 점은 보육료 삭감 부분이다. 수년 간 동결되었던 보육료를 6% 인상해 놓고 조삼모사 격으로 맞춤 보육 대상자의 보육료를 20%나 삭감한다니 가뜩이나 노동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대가를 받고 일하는 선생님들이 걱정이다. 그리고 이는 곧 내 아이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동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월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동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업맘으로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해주는 보육시간이 짧아지니 줬다 뺏는 기분이고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다. 워킹맘의 하루가 ‘일’로 시작해서 ‘육아’로 끝을 맺는다면 전업맘의 하루는 ‘집안일’로 시작해서 ‘육아’로 끝을 맺는다. 우리 모두 똑같이 일하는 셈이다. 게다가 바깥일과 집안일의 노동 강도의 차이는 크지 않다는 점, 이제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회는 여전히 전업주부의 노동은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나마 집안일과 육아만 할 수 있는 전업주부라면 상황은 나은 편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소위 ‘무늬만 전업주부’인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을 쪼개서 부업을 하거나 공부를 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고 프리랜서여서 비정기적으로 일을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어린이집 종일반을 이용할 수 없다. 물론 관련 증빙서류를 낼 수 없다면 직접 ‘자기기술서’를 써서 인정받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원은 학업 중으로 인정하나 일반 학원이나 방송통신대학교는 해당하지 않으며 구직 중임을 증명하는 구직등록확인서는 1회만 인정된다고 하니 효력이 3개월뿐인 구직등록 확인서로는 장기간의 구직활동은 보장받을 수 없다. 이처럼 까다로운 기준을 뚫고 자신의 처지를 입증하기란 어려울뿐더러 사생활을 글로 적어 확인받아야 한다니 어쩐지 스스로가 구차해진다.

나 역시 겉으로는 전업주부지만 속을 가만 들여다보면 잠재적인 구직자에 속한다. 일어번역가를 목표로 준비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공부도 많고 읽어야 할 책도 쌓여 있는데 아이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다. 그런데 지금보다 일찍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니 답답하다. 운 좋게 일을 시작한다 해도 문제다. 번역가는 안정되기 전까지 꾸준히 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일하다 쉬기도 하고 갑자기 일할 수도 있는데 이런 불규칙한 상황을 나라에서 인정해 줄지 의문이다.

물론 이런 개개인의 사정까지 다 살펴 달라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저출산, 경력단절여성의 증가, 어린이집 아동 학대 문제가 심각한 이 시점에 왜 굳이 일의 여부를 기준으로 보육 시간을 나눠야 했냐는 점이다. 기형적인 보육시간과 지원금을 현실화하고 싶었다면 맞춤반과 종일반을 나누되 차라리 종일반의 보육료를 인상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한정된 예산을 핑계로 자꾸만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에 손을 대니 안타깝다.

5월 20일부터 어린이집 종일반 개별 신청이 시작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무늬만 전업주부’인 엄마들이 종일반 자격을 인정받을까. 작은 외침들은 또 묵살되고 결국 아무렇지 않게 7월이 올 것만 같다.

이정미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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