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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말레이판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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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말레이판 ‘국채보상운동’

입력
2018.06.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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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27세 여성의 클라우드펀딩 계정에서

말레이시아판 ‘국채보상 운동’을 이끌어 낸 샤자리나 박티(가운데). 박티 페이스북 캡쳐
말레이시아판 ‘국채보상 운동’을 이끌어 낸 샤자리나 박티(가운데). 박티 페이스북 캡쳐

지난달 61년 만에 정권을 교체한 말레이시아에서 국채보상 운동이 ‘들불’처럼 일고 있다. 새 정부는 전 정권이 분식회계를 통해 국가 부채를 축소ㆍ은폐 했다고 폭로한 바 있으며, 이 같은 움직임은 15년 만에 말레이시아를 다시 이끌고 있는 마하티스 모하맛 총리가 나랏빚을 줄이기 위해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HSR), 전철 3호선(MRT3) 등 대규모 사업들을 잇따라 취소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2일 더말레이시안인사이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전날 오후 3시 현재 ‘타풍 하라판 말레이시아’(THM) 펀드에 1,860만링깃(약 50억3,000만원)이 입금됐다. 하루 전날 림관엥 말레이시아 재무장관이 밝힌 기부금 액수(700만링깃) 세 배에 근접하는 금액이다.

현지 의사 일란다 빈 모하마드 이드자힘(36)씨는 “새로운 말레이시아를 향해 가는 길에 놓인 문제를 함께 극복하자는 대중의 합의가 있다”며 “6월 1일부터 사라진 재화용역세(GST) 6%를 THM에 입금하자는 의견도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 라이온에어의 말레이시아 자회사 말린도에어도 승객 한 명당 1링깃을 THM 펀드에 기부하겠다고 밝히는 등 민간 기업들의 모금 활동도 확산하고 있다.

말레이시아판 국채보상 운동의 발단이 된 고겟펀딩의 한 계정. 말레이시아 정부가 공식 계정을 만들면서 이 계정을 통한 모금 활동은 중단됐다.
말레이시아판 국채보상 운동의 발단이 된 고겟펀딩의 한 계정. 말레이시아 정부가 공식 계정을 만들면서 이 계정을 통한 모금 활동은 중단됐다.

20년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금모으기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이 운동은 법무법인 ‘시스터스 인 이슬람(SIS)’의 직원 샤자리나 박티(27)가 클라우드펀딩 사이트 ‘고겟펀딩’에 계정을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돈과 귀중품을 모아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툰쿠(Tunku)에게 전달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며 말레이시아의 빚을 줄이기 위해 기금조성 페이지를 개설했다고 밝혔다. 툰쿠 압둘 라만은 말레이시아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1957년 독립 후 1970년까지 초대 총리를 지냈다.

애국심을 자극한 글과 함께 지난달 25일 개설된 샤자리나의 계정은 말레이시아 국민들 사이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3,600달러(약 380만원) 이상의 돈이 모였다. 하지만 난국을 이용한 사기라는 비판도 많았다. 현지 방송활동가 KC 나자리(35)씨는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당시 돈을 어떻게 정부에 전달할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국가경제 회복을 위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국민들의 성원이 정부로 답지했고, 말레이 정부는 이에 힘입어 말레이시아 최대은행 마이뱅크(Maybank)에 계좌를 개설, 지난달 30일부터 모금을 시작했다. 림관엥 장관은 “모인 돈을 전액 국가 부채 삭감에 사용될 것”이라며 모금 운동을 시작한 샤자리나에게 사의를 표시했다. 림 장관은 “금액은 적어보일지 모르지만, 나라 빚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 정신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정부 계정이 만들어짐에 따라 샤자리나의 클라우드펀딩 계정은 모금을 중단했다.

THM 계정으로 급격하게 돈이 몰리자 가짜 계좌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말레이 정부가 공식 발표한 계좌 광고와 똑같은 모양의 이미지가 SNS 등을 통해 확산하고 있는 것. 숫자 ’1’ 하나가 7’로 표시돼 있는 등 언뜻 봐서는 THM 계좌처럼 보인다. 림 장관은 “국민의 선의를 왜곡하고 여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재정부 트윗어에 올라온 가짜 계정 경고 글.
말레이시아 재정부 트윗어에 올라온 가짜 계정 경고 글.

앞서 지난달 9일 치러진 총선에서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뤄낸 말레이시아 신정부는 직전 정권이 1조87억링깃(약 293조원)에 이르는 국가부채를 분식을 통해 7,000억링깃(약 188조원) 미만으로 속였다고 발표했다. 1조87억링깃은 지난해 말레이시아 국내총생산(GDP)의 80.3%에 해당한다.

한달 사이 국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총사업비 600억링깃(약 16조원) 규모의 말레이∼싱가포르 고속철(HSR) 사업을 취소하기로 하는 등 대대적 재정긴축에 착수했다. 400억링10조8,000) 이상 들것으로 예상되는 클랑 밸리 전철 3호선(MRT3) 공사도 중단키로 했으며, 지난해 착공한 동부해안철도(ECRL) 건설 프로젝트 역시 수익성 문제를 다시 따지기로 했다. 전 정부가 총사업비 550억링깃(약 15조원) 중 85%를 중국으로부터 빌려 추진한 사업이다.

마하티르 총리는 “이런 건설 프로젝트들만 정리해도 국가부채 20%를 줄일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싱가포르=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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