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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넷에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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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넷에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

입력
1997.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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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삶 복판서 문학의 진정성 보여준 90년대 리얼리스트22일 세상을 떠난 소설가 김소진씨는 90년대 가장 탁월한 리얼리스트였다.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바람 부는 황야처럼 맘 둘 데 없는 이 시대」를 영원히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문단에서는 희귀하다 할 정도의 시대와 작가의식을 보여준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어설픈 기억의 장사꾼」으로 겸양한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닳아가는 자신의 기억에서 이끌어낸 이야기들은 그대로 우리 시대와 사람들의 고통스런 초상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 철 지난 유행어처럼 들리는 리얼리스트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그가 동년배 다른 작가와는 달리 현재와 과거에 섣부르게 환멸하는 포즈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있지도 않았던 「아름다운 과거」 혹은 「멋들어진 도시적 현재」로 도피하지 않았다.

「지나간 우리의 삶은 너절했어… 왜냐? 우리는 지난 시절 내내 아무 이유 없이 취해 있었어. 술이래도 좋고, 정의래도 좋고, 양심이나 민족주의래도 좋고 아무튼 그런 것들 말이야…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빤스 속을 그 어떤 거대한 손에 내맡긴 거지」(「경복여관에서 꿈꾸기」 중에서)

운동권이었다가 고소득 학원강사로 변신한 선배가 아내의 자동차 닦아주는 일로 소일하는 무능한 작가인 주인공에게 하는 이 말은 얼핏 후일담·소설가소설의 전형적 푸념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김씨는 바로 뒤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부가가치」라는 말을 덧붙여 현재를 조소하면서 「내가 한 때 뭔가와 불화했거나 적어도 불화하는 시늉을 했을 때, 사실 그것은 세상과의 화목을 목마르게 꿈꾸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그는 정말 세상과의 화목을 목마르게 꿈꾸어 왔다. 포로수용소에서 이념을 상징하는 「맹탕 헷것」인 흰 쥐를 길렀던 아버지와 운동권아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아픈 가족사와 이념문제를 드러낸 등단작 「쥐잡기」에서부터, 가짜 대학생의 행적을 통해 80년대초 학번들이 살아온 16년 세월의 한 단면을 깔끔하게 정리해낸 최근작 「울프강의 세월」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등단 후 7년이라는 결코 길지않은 기간에 그는 끊임없는 정열로 분단, 민중, 외국인노동자 문제까지 「우리 당대를 고민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의 본질을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의 차원에서 복원해 놓은 90년대 최초의 작가」이자 「이 시대의 이야기를 커다란 그릇에 담아내는 총체성을 담지할 수 있는 작가」(문학평론가 서경석)였다.

「길을 보면 왠지 위로가 된다. 널찍한 도로나 반듯한 길거리보다는 걷다가 언제든지 걸터앉아 다리쉼을 할 수 있는 뒷골목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면 더욱 그렇다… 가야 할 길보다 무작정 걷는 길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그런 길의 끄트머리에는 반드시 고달픈 한 몸쯤은 누일 만한 집이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길」 중에서)

그가 가는 길에 편히 걸터앉아 다리쉼하고, 고단하면 몸 누일 수 있는 집이 있기를 바란다.<하종오 기자>

□고 김소진 약력

▲63년 강원 철원 출생 ▲89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90∼95년 한겨레신문 기자 ▲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쥐잡기」로 등단 ▲96년 문체부 「젊은 예술가상」 수상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93년) 「고아떤 뺑덕어멈」(95년) 「자전거 도둑」(96년)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95년) 「양파」(96년) 장편동화 「열한 살의 푸른 바다」(96년) 꽁트집 「바람 부는쪽으로 가라」(96년) 장편소설 「동물원」 실천문학 97년 봄호까지 2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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