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 기자

등록 : 2018.02.03 14:00

[인물 360˚] “응답하라 1991” 남북단일팀이 부른다

등록 : 2018.02.03 14:00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는 여자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유순복 선수(북), 홍차옥 선수(남), 현정화 선수(남), 이유성 코치(남), 조남풍 감독(북), 이분희 선수(북). 이유성 단장 제공

Back to ‘1991’

“Korea!”

1991년 4월 29일, 일본 지바(千葉)의 마쿠하리(幕張) 컨벤션센터 경기장.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팀이 호명됨과 동시에 눈물 섞인 함성이 쏟아졌다. 익숙한 멜로디가 장내에 흐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목소리가 모아졌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었다. 여자 탁구 남북 단일팀 ‘코리아’는 1975년 이후 16년간 세계 정상을 지켜온 강호 중국을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탁구대를 사이에 둔 ‘적수’였던 현정화-이분희 선수는 나란히 시상대 위에 올랐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자락이 뜨거워지는 장면이다.

탁구만이 아니었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진 1991년은 남북 스포츠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남북 축구단일팀도 6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8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일궜다. 반세기 가깝게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춘몽'은 짧았다. ‘단일팀을 정례화하자’는 들뜬 목소리는 묻혀갔고, 그 후 오랫동안 남북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27년 만의 단일팀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한치 앞을 모르던 남북 관계가 돌연 해빙 국면으로 들어서고,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평창 단일팀 결성을 밀어붙였다. 지난 1월 25일, 남북의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어색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이유다. 분위기는 91년 당시와 사뭇 달랐다. ‘올림픽 무대만을 보고 달려온 선수들의 기회를 빼앗는 게 온당하냐’ ‘자력으로 따낸 출전권이 아니니 대의를 따라야 한다’... 말들이 끓었고 마음은 식었다. ‘하나 된 남북’이라는 수사는 20세기의 유물이었을까. 단일팀을 떠올린 누군가의 머릿속은 ‘어려울 게 뭐 있나’ 싶었을 게다. 하지만 되짚어본 27년 전의 남북 단일팀도 결코 쉽진 않았다.

1991년 4월 30일 한국일보는 남북 탁구 단일팀 여자 단체전 우승 소식을 1면 헤드라인으로 전했다.

탁구단일팀- North도 South도 아닌 ‘Korea’의 이름으로

당시 한국 탁구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간판스타였던 현정화 선수가 ‘탁구 여제’ 자리를 굳혔고, 대표팀은 1990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중국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그런 한국에게 북한은 늘 ‘복병’이었다. 최강자인 중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실력에 버금가는 북한을 제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강자끼리 힘을 합하면 최강자를 꺾을 ‘시너지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 탁구 단일팀은 바로 그런 기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대회를 한 달 앞두고 ‘팀을 합친다’는 소식은 당시 대표팀 선수들에게도 갑작스럽기만 했다. 특히 남한의 홍차옥과 북한의 유순복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상대국의 스타인 이분희와 현정화의 그늘에 가려 복식 주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순복은 당시 인터뷰에서 “분희 언니와 대회를 준비하며 금메달의 꿈을 부풀려 왔는데, 처음 단일팀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 가슴이 아팠다”라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감독과 코치진 사이의 갈등도 걸림돌이었다. 단일팀의 총감독을 맡았던 남측의 윤상문 감독과 북측의 조남풍 코치가 자주 충돌했다. 상대적으로 어렸던 남측의 이유성 코치가 융통성을 발휘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했지만, 사공 많은 배를 목적지로 끌고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막을 한 달 앞둔 1991년 3월 26일, 남북 단일팀은 일본 나가노(長野)에서 처음 만났다. 분단의 세월만큼 서로의 모습은 생경했다. 우선 말부터가 그랬다. 선수들 사이에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가는 경기 용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 ‘서브’는 ‘쳐넣기’, ‘커트’는 ‘깎아치기’였다. “어휴, 말째다!” 경기 도중 튀어나온 북한 선수의 사투리는 남한 선수의 귀에 와닿지 않았다. 알고 보니 ‘어렵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말 째는’ 상황.

1991년 당시 남북 단일 유니폼을 입은 코리아 탁구 선수단. 왼쪽부터 이유성 코치(남), 김혜영 선수(북),이분희 선수(북), 유남규 선수(남). 이유성 단장 제공

하지만 함께 흘리는 땀은 진하고 끈끈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살을 부대끼며 훈련하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모습들을 닮아갔다. 북쪽 선수들은 ‘파이팅’을, 남쪽 선수들은 ‘이기자’를 외쳤다. 국민의 기대를 짊어진 국가대표들이라 해도 고작 스물하나, 스물둘의 나이였다. 몰래 서로의 방을 오가며 고민을 속닥거렸고, 비상계단에서 김치와 통조림을 나눠먹었다. “사람 사는 것, 참 별거 없이 비슷하구나”라는 깨달음에 서로를 낯설게 여겼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자연스레 ‘남측’, ‘북측’이라는 호칭은 버렸다. ‘북한의 이분희 선수’가 아닌 그냥 ‘분희 언니’였고, ‘남한의 현정화 선수’가 아닌 그냥 ‘정화 동생’ 이었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 North도 South도 구분하지 않는 ‘Korea’라는 팀 명에 걸맞은 모습이 돼 갔다.

4월 26일 중국과의 결승전 마지막 세트, 유순복이 넘기고 중국의 가오쥔이 받아친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체육관을 빼곡히 메운 재일 동포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불렀다. 반세기의 울분이 섞인 목소리였다. 북한 출신의 재일 동포 단체 ‘조총’과 남한 출신의 ‘민단’은 평소의 껄끄러움도 잊고 ‘푸른 한반도’가 그려진 단일기를 함께 흔들었다. 남북 단일팀은 선수, 감독, 임원 할 것 없이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와 서로를 얼싸안았다. 일본 땅에서 이룬 ‘작은 통일’이었다.

1991년 4월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유성(왼쪽) 코치와 조남풍 감독이 서로 상의하고 있다. 이유성 단장 제공

청소년축구단일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짙은 아쉬움

그 해 5월 남북의 축구 꿈나무들도 한 데 모였다. 이미 ‘46일’ 간의 짧은 통일을 경험했던 만큼 두 번째 단일팀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엔 기대가 넘쳤다. 그러나 코리아 팀 훈련을 맡을 남대식 코치의 머릿속은 근심만이 가득했다. 탁구와 축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탁구는 개인 운동이라 선수들 각자의 장점이 합해지면 “1+1=2”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단체경기인 축구는 아니었다. 개인의 기량이 최고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했다. 문제는 그 팀워크란 게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지 않는다는 것. 한 달은 그들에겐 턱없는 시간이었다.

1991년 5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해 북측 선수단 70명이 서울을 방문했다. 1차 평가전에서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남북 선수들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발 빠른 북쪽 선수들은 ‘공격’에 적합한 반면 임기응변이 좋은 남쪽 선수들은 ‘수비’에 걸맞아 언뜻 보기엔 최고의 궁합이었다. 하지만 한 팀으로 경기를 해보니 양측의 장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첫 평가전에서 남북 선수들은 내내 손발이 어긋났고 각자의 개인기에만 의존했다. 기대에 미치기는커녕 “단일팀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라는 혹평이 나왔다. ‘엇박자’는 포르투갈 현지로 날아가 시작된 전지훈련에서도 계속됐다. 상위권 진입은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잇달아 쏟아졌다.

하지만 스무 살도 안 된 청소년들의 흡수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서로에게 적응해 갔다. 부딪히면 서로 일으켜 세워주고, 일어서면 함께 뛰었다. ‘부진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직력은 대회를 목전에 두고 눈에 띄게 강해졌다. 그리고 대회 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가볍게 꺾는 이변이 일어났다. 1승 1무 1패.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유럽의 강자들이 포진한 조에서 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축구 최강국 브라질에 가로막히며 최종 성적은 8강 진출에 그쳤지만 ‘파란’에 가까운 성과였다.

1991년 6월 23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 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코리아팀의 최영선 선수가 상대수비의 태클 위로 슛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결과는 빛났지만 아쉬움은 짙게 남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단일팀을 총괄 지휘했던 북한의 안세욱 감독은 “보다 오랜 기간 훈련을 했다면 선수들이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훈련 기간이 너무 짧아서 못내 아쉬웠다”라고 밝혔다. 장충식 단장은 “선수 문제에서 서로 너무 양보하다 보니 각자의 주장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못했고 그것이 결국은 팀의 한계가 됐다”라며 “앞으로는 어떤 단일팀이 이뤄지더라도 서로의 생활에 대한 이해 없이 급조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으로 하나됨’을 보여야 한다는 게 1세대 코리아팀이 남긴 교훈이었다.

2018년 평창 ‘코리아’는 어떻게 기억될까

지난달 25일 대한민국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단일팀으로 함께 뛸 북한 선수단을 처음으로 만나 꽃다발을 건네며 환영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91년 탁구 단일팀 여자 코치를 맡았던 이유성 단장(현 대한항공 스포츠단 소속)은 평창 올림픽 단일팀 구성 과정을 두고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묵과한 점이 가장 미숙했다”라고 지적한다. 차근차근 밟아야 할 절차를 일방적으로 생략했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선수들을 섬세히 배려하지 못했다. 과거의 시행착오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시작이 서툴렀다고 포기하기엔 이르다. 91년의 주역들은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 단장은 “여자 아이스하키는 아직 대학팀도 실업팀도 구성돼 있지 않은 상황이니 만큼 평창 올림픽 이후가 더 중요하다”며 “평창을 대한민국 여자 아이스하키를 널리 알리고 육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정화 감독(현 한국마사회 탁구단 소속) 또한 최근 한 칼럼에서 “올림픽 단일팀이라는 잠깐의 이벤트에서 끝날 게 아니라, 정부의 정책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선수들에게 ‘코리아’라는 이름이 희생으로 기억될지 도약의 발판으로 기억될지는 ‘앞으로’에 달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진천선수촌의 빙판 위에서 손발을 맞추고 호흡을 나누고 있다. 상처 입은 시간들을 보듬고 있다. 단일팀을 바라보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이 선수들에게 닿기를, 2018년의 부름에 1991년의 함성이 다시 응답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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