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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공격보다 끈질긴 대화.. '싸가지 있는 정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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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공격보다 끈질긴 대화.. '싸가지 있는 정치'의 길

입력
2017.02.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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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있는 정치’ 실종

정책 대결 자신 없으니 막말로 제압

온화한 태도 보이면 “뜻 굽히냐” 비난

스타일 확실해야 실수 충격파 줄어

정치란 수많은 의견들을 조율해 합의를 도출하는 협업과 타협의 과정이므로 싸가지즘은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정치란 수많은 의견들을 조율해 합의를 도출하는 협업과 타협의 과정이므로 싸가지즘은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불법을 저지른 건 용서해도, 예의 없는 건 용서 못하겠다는 거냐.’ ‘옳은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 것보다 옳지 못한 말을 싸가지 있게 하는 게 더 낫다는 건가.’

시사평론가 김용민씨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에 대해 ‘싸가지 심판론’이 제기됐을 때 터져 나왔던 반론들이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싸가지즘’(싸가지 여부로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이 한국 정치판에서 지나치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옳은 것을 말했는지 그 내용에 주목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과 태도만을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더 구태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싸가지즘은 강력하다. “정계 개편을 한다면 싸가지 있는 놈과 싸가지 없는 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정치권에서 주기적으로 운위될 정도다. 지난해 2월 테러방지법 입법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벌어진 필리버스터 당시 김광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5시간 33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보수 종편에 책 잡히지 않기 위해 짝다리 한번 안 짚고 버텼다”고 털어놓았다. 19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던 그가 짝다리 짚고 서서 목청을 높였더라면 ‘싸가지 정계개편론’이 불거질 때마다 ‘싸가지 없음 계파’로 분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싸가지 있는 정치라는 건 어떤 걸까. 누가 권력을 잡든 변함없이 그 옆에 서서 환한 얼굴로 웃는 ‘의전의 황제/여왕’들은 싸가지가 있는 것인가. 권력자를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시며 걱실걱실한 ‘아우 애티튜드’를 선보인 당내정치 실력자들인가. 흔히 ‘처세의 달인’들이 싸가지 있는 정치인으로 오인되면서 싸가지즘이 예의범절의 범주로 협소하게 국한된 것도 사실이다.

싸가지 있다는 말이 정치적 용어로 사용될 때 그것은 사회 일반에서 통용되는 예의범절의 의미를 넘어선다. 정치란 ‘수많은 의견들을 조율해 합의를 도출하는 협업과 타협의 과정’이라는 거대한 의미망 속에서 싸가지즘은 작동한다. 자신만 언제나 옳다는 아집, 끊임없이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며 상대를 악으로 몰아가는 독선, 상대편에 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상(刺傷)을 내겠다는 아득한 결기. 이 모든 게 총동원돼 막말과 인격모독의 형태로 구현되는 ‘파괴적 싸가지’는 대화의 기술인 정치를 파행으로 몰아넣는다. 싸가지 있음은 ‘정치적 대화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언어 및 태도 전략’이라고 정의돼야 하지만, 이는 한국 정치권에서 야바위와 훼절 행위로 곧잘 폄하되곤 했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싸가지 여부는 은밀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정치인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싸가지 여부는 은밀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정치인들의 싸가지 없음은 진짜 전선을 우회하고 은폐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가령 해결이 어려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정책적으로 대결할 자신이 없으니 엉뚱한 싸가지 논쟁을 벌이는 식이다. 윤 실장은 “싸가지 없다는 비판을 받아도 자기 성찰보다는 ‘새누리당식 비판이다’ 같은 반론으로 덮어씌우는 게 야권의 유구한 전통”이라며 “새누리당 역시 야권 정치인들에 대해 종북으로 덮어씌워 유리한 고지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건 매한가지”라고 지적했다.

똑같이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해도 싸가지 있(다고 평가되)는 정치인은 설화를 거의 입지 않는다. 최근 지지율 상승세를 타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는 싸가지즘의 측면에서 귀추를 주목할 만하다. 대권 출마 선언을 하면서 “국민은 공짜밥을 원하지 않는다. 시혜적 정치와 포퓰리즘은 청산돼야 한다”고 한 것은 복지 논쟁을 상당히 후퇴시켰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크게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데, 소위 싸가지 있다고 평가되는 품성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윤 실장은 “안 지사의 장점으로 여겨지는 좋은 품성과 차차기 주자라고 생각하는 야권 지지층들의 보호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다른 주자들이 했으면 문제가 됐을 ‘공짜밥’ 발언이 묻힌 것 같다”고 분석했다.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섣불리 싸가지즘의 전략적 유효성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박성민 민 컨설팅 대표는 “정치에서는 자기 스타일,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안희정 지사의 안정감과 이재명 시장의 박진감 모두 자기 품성에서 우러나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어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정답이 정해진 게임이 아닙니다. 정해진 전략도 없고요.” 박 대표는 “압도적 대세론을 갖고 있는 문재인이라는 강력한 상대를 맞아 이미 두 주자 모두 선전한 것”이라며 “이 성과를 앞으로 얼마나 더 밀고 나갈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후보 경선 관전 포인트가 하나 추가됐다. 사이다냐, 싸가지냐, 이것이 문제로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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