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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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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월식

입력
2018.02.04 17: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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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집이었다. 한 군데 트여 있는 정면으로는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푸르고 붉은 지붕들이 내려다 보였다. 아침 저녁으로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유난히 짙은 날에는 지붕들이 희뿌옇게 지워지기도 했다. 도시 사람들이 놀러와 “이 집이 서향이지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괜한 트집이라도 잡힌 듯, “아니에요, 남서쪽이에요.”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집은 남쪽으로 조금 몸을 틀어주었다.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다가 마루에서 잠들었던 날,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에, 굳이 고개를 들거나 돌리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각도에, 달이 둥실 떠 있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들기 안타까울 정도로 가까이 대면한 달빛이었다. 달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스르륵 움직여 산 너머로 사라졌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달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꾼 것인가 의아해 하다가 뒤늦게 마음이 설렜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사 온 뒤 나는 집 없는 사람이 되었다. 서울 주변부 신도시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파트에서도 살아 보았다. 대부분은 내 소유가 아닌 곳들이었고, 한 동안 내 소유인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부엌 유리창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 일도 없었고, 축사에서 올라온 쇠파리 떼가 천장을 점령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생필품을 사러 한참 차를 타고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춥지도 않고 사는데 큰 불편함이 없는 그 주거 공간들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 밖을 가로막은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견고한 붉은 벽돌담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마루에 낡은 이부자리 펴고 눕고 싶다. 누웠다가 눈을 뜨면 나를 내려다보던 달이 산 너머로 고요히 모습을 감추는 집에 가고 싶다. 나의 우울은 없는 집을 그리워하는 증상으로 나타나곤 했다.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드니까 부쩍 더 그래요.” 며칠 전에 만난 선배에게 하소연했다. 선배는 말없이 웃었다. “요즘 제가 책에서 읽은 건데,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사는 게 돈을 버는 거래요. 그것도 서울에 아파트를 사야 한대요.”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걸 모르니? 돈이 없어서 집을 못 사는 거지. 그런데 넌 그걸 이제야 책을 읽고 알았다는 말이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또 칭얼거렸다. “어쨌든 집이 없으니까 쓸쓸해요.” 선배는 싱긋 웃었다. “난 안 그래. 아직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게 재밌어.” 생각해 보니 선배는 한 군데에서 2,3년 이상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처럼 서울을 중심으로 빙빙 돌았던 것도 아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바닷가 도시로 갔다는 소식이 들렸는가 하면 어느 새 다른 도시로 훌쩍 떠나 있곤 했다. 냉동 창고들 사이 파랗게 토막 난 바다가 보이던, 선배의 예전 집 창 밖 풍경이 떠올랐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집은 집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집 밖에 있는 것이로구나.

그날 선배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낡은 한옥을 개조한 음식점 마당에 앉아 있었다. 처마와 출입문 사이 빈 공간을 천막과 비닐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사이로 하늘이 보였고, 그 좁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분명히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이따금 한 번씩 올려다볼 때마다, 달의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점점 작아졌다. 빌딩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것인가. 사람들 대화에 한참 귀 기울이고 있다가 문득 궁금해져 다시 올려다보았다. 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 참 허랑한 일이었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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